
자주와 해방, 통일운동의 길에 평생을 바친 비전향 장기수 박순자(본명 박수분) 선생이 4일 오전 0시 25분쯤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 선생은 골다공증과 디스크, 신경협착증 등 지병을 앓아왔다. 박순자 선생은 경남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해방을 맞았고, 좌익운동을 하던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16세 때 남조선노동당 산하 무장조직 ‘야산대’ 활동을 시작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정식으로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하동군 여맹(여성동맹) 조직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공세를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1952년에는 하동군 여맹조직부장과 군여맹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경남도당 조직지도원으로서 마지막 빨치산 투쟁인 의령투쟁에 참여했다. 입산 13년 만에 체포된 정순덕 선생을 제외하면, 박순자 선생은 흔히 ‘마지막 여성 빨치산’으로 불렸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이던 그는 11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1965년 3월, 34세의 나이로 출소했다. 이듬해 결혼한 선생은 첫딸을 낳았으나, 감옥생활의 후유증과 고령 출산으로 인해 딸은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갖게 되었다. 두 해 뒤 둘째 딸을 낳았다.

남편은 통일운동가 고 최상원 선생으로, 일제강점기 강제징병을 거부하고 탈주해 투옥된 뒤, 1970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평생 다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두 사람은 전국 각지의 민주화·통일운동 현장을 함께하며 ‘부부 통일운동가’로 널리 알려졌다.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이후 박순자 선생은 범민련 남측본부 부경연합 고문, 6·15공동선언실천위원회 고문, 전국여성연대 지도위원, 통일여성회 고문, 진보연대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했다. 2002년 금강산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 2004년 평양 ‘남북여성대회’에도 참가했으며, 같은 해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여전사>가 제작되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송될 당시, 선생은 “장애가 있는 딸을 두고 갈 수 없었고, 이 땅에서 통일운동을 이어가야 했다”며 북송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2018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싸우던 시절의 꿈을 꿉니다.
그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체험했고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꿈꾸던 세상에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영면했다.
빈소는 부산 동구 초량동 인창병원 장례식장 201호에 마련되었으며, 장례는 ‘애국투사 박순자 선생 민족민주장’으로 치러진다. 추도식은 5일 오후 8시, 발인은 6일 오전 7시 30분, 영결식은 6일 오전 8시 30분에 민주공원에서 열린다. 장지는 서울 종로구 금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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