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2차대전 종전 80주년과 전쟁의 책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맞은 지난 5월 8, 9일(서유럽은 8일, 러시아는 9일을 기린다) 유럽은 조용했다. 10일 유럽연합의 순번제 수장인 폴란드의 투스크, 프랑스의 마크롱, 독일의 메르츠와 영국의 스타머 총리 등이 키예프를 방문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와 결속을 확인했지만,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는 이미 빛이 바랬다.
푸틴의 러시아는 붉은 광장에서 화려한 열병식으로 승전국 군대의 위용을 과시했지만, 시진핑 주석 등 몇 안 되는 러시아 동맹국 정상들이 자리를 지킨 사열대는 썰렁했다. 이 전쟁이 ‘서양’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위협하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에 대한 응징이라는 푸틴의 선전을 믿는 세계 각국의 극단적 반서구 민족주의자들만 감동했을 뿐이다.
나는 우연히 프라이부르크에서 종전 80주년을 맞는 바람에 지방 차원의 행사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녹색당과 사민당 등 진보정당의 전통이 강하고 시정을 장악했다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았다. 진보 진영의 종전을 기리는 행사는 조촐하기만 했고, 그나마도 60~70대로 보이는 노년층이 많았다. 종전 일주일 뒤인 15일 대학 본관 옆 시너고그 터에서 열린 팔레스타인의 ‘쇼아’ 나크바 77주년 기념 반이스라엘 시위가 오히려 눈에 더 들어왔다.
1940년대 말 독일선 전쟁 책임 회피 만연

기념행사에 나온 여러 플래카드 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5월 8일을 ‘해방의 날’이라고 쓴 플래카드였다. 많은 유럽인과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해방했고 누가 누구한테 해방됐는가 하는 질문을 곱씹다 보면, ‘해방일’이라는 규정은 모호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해방에 거는 정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해방일’이라는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세탁해 버리기 쉽다. 폭력과 압제의 피해자뿐 아니라 공범자와 가해자, 방관자들까지 ‘해방’에 묻어가기 때문이다. ‘피와 땅’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나치 시절 히틀러의 지식 통제에 호응하며 총장을 지낸 바로 그 프라이부르크 대학 앞에서 내 생각은 복잡하기만 하다.
독일인들이 종전을 해방으로 받아들인 건 전쟁이 끝난 지 한참 후의 일이다. 패전으로 독일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점령군의 탓으로 돌리는 전쟁의 책임 회피와 변명이 1940년대 말 독일을 지배했다. 연합국 점령군들이 독일의 불행에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심술궂은 쾌감)을 느낀다고 독일인들은 불평했다.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통해 독일인들의 죄의식을 일깨우려는 점령군의 태도는 단순한 반독 선전으로 치부되었을 뿐이다.

1946년 11월 미군 점령지역의 한 조사에서 독일인 응답자들의 37%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기타 ‘비’아리아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고 응답했다. 1952년에는 약 37%의 응답자가 유대인들이 없는 게 독일에 더 득이라고 답했다. 종종 있었던 유대인 묘지 훼손이나 시너고그 벽의 반유대주의 낙서 등은 철없는 청소년 우범자나 공산당의 짓이라고 도외시됐다. 1962년의 길거리 인터뷰에서 정장 차림의 노신사는 독일에 유대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1963년 열린 아우슈비츠 전범 재판의 피고 22명 중 누구도 회개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자는 없었다.
비판적 기억의 분수령이 된 68혁명을 거친 후에도 변명조의 기억은 완강하게 남았다. 1975년의 여론조사를 보면,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박해한 것만 빼면 나치가 반드시 나쁘지 않았다는 응답이 35%, 잘 모르겠다는 답이 23%에 달했다. 전직 나치 친위대들은 여전히 ‘전우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모였고, 나치의 휘장을 모방한 배지를 보란 듯이 달고 다녔다.
반파시즘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독의 사정이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동독 공산당에서 나치당 출신 당원의 수는 25%가 넘었다. 동독에서 전직 나치당원은 정교수의 28.4%, 국회의원의 14%, 고위공무원의 14%에 달했다. 대법원장을 지낸 쿠르트 슈만이나 작센주의 재무장관 빌헬름 아담도 그중 하나였다. 나치즘은 자본주의 서독의 문제라며, 동독 공산당은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파울 메르커는 시온주의 첩자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었다.
패전 이탈리아나 일본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탈리아인들의 기억에서 파시즘은 이탈리아 역사의 주류가 아니라 밖에서 강요된 생소한 이념이었다. 파시즘은 타락한 부르주아와 외세의 합작품으로 여겨졌다. ‘좋은 이탈리아인’과 ‘나쁜 파시스트’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며, 파시스트들의 잔학 행위에 대해 보통 이탈리아인에게 책임을 묻거나 죄를 추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은 그냥 과거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지워졌다.
전후 일본의 집단기억에서 일본 국민은 전쟁과 군국주의의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군부·군국주의·체제와 같은 추상의 몫이었다. 그래서 일본 민중과 아시아 민중은 일본 군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인식과도 일치했다. ‘권위에 복종하는 봉건적 관습의 노예’인 일본 국민은 천황에게 전심전력으로 충성을 바쳤지만, 군부 지도부의 배반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는 오리엔탈리즘이 그 밑에 있었다.

자신을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총력전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전을 패전이 아닌 해방의 계기라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전쟁에 패한 날이 아닌 해방일이라는 생각은 1985년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종전 40주년 기념 연설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사민당과 기민당 좌우 양쪽에서 모두 신망받는 정치인이었기에 그의 연설은 더 무게가 있었다.
종전은 전쟁을 일으킨 나치나 파시스트,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패배일 뿐, 파시스트의 압제에서 신음하던 많은 사람에게 그들의 패전은 우리의 해방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자명했다. 바이츠제커의 ‘해방일’ 연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패전이 독재 권력과 민중의 입장을 동일시한다면, 해방은 전쟁범죄자들로부터 선량한 민중을 떼어 놓는 수행적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 책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
독일의 개념사 연구에 따르면, 책임은 기본적으로 일의 결과에 대해서 지는 의무와 부담이라는 뜻이다. 중세에는 기소된 자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행위를 주로 가리켰는데 오늘 날에도 위법한 행위를 한 자에 대해 불이익이나 제재를 가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나 유럽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영어·불어·독일어·폴란드어에서 책임을 뜻하는 responsibility, responsabilite, Verantwortung, odpowiedzialność 등은 모두 누군가에게 응답한다는 어원을 갖고 있어, 사법적 추궁의 의미가 강한 한자 문화권의 ‘책임’과 갈라진다. 응답한다는 의미와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같이 있는 영어 단어 answerability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홀로코스트도 많은 이들 동조해야 가능
21세기의 기억 연구에서 역사적 책임을 논할 때, 응답 가능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회나 개인이 과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응답하는 행위이다. 누가 누구의 목소리에 왜 어떻게 응답하는가가 그 사회의 기억 문화를 결정하는 열쇠인 것이다. 억울하게 죽고 그 죽음조차 잊힌 채 침묵해야만 했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회일수록 자기성찰적이고 건강한 기억 문화를 가진 사회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기억의 책임은 사법적 시시비비를 넘어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의 주름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은 강제든 자발이든 많은 주민의 동조와 참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히틀러를 비롯한 소수 나치가 11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소련군 포로, 공산주의자들, 로마와 신티(유럽 내 집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비하적 의미가 있는 단어 ‘집시’에 비해 존중하는 말로 여겨져 여러 국제기구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한다), 동성애자, 반사회분자들은 강제수용소에 넣어 관리하고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해방일’은 독재와 전쟁범죄에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소수의 전범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역사의 면죄부를 발부하는 결과를 낳는다. 전범의 사법적 죄를 묻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수 동조자나 방관자의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묻고 답할 때 그 사회의 기억 문화는 더 건강하다. 역사에 대한 궁극적 해석과 판단을 법정에 맡기는 역사의 사법화가 마치 진보적 역사 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우리의 기억 문화는 얼마나 건강한 것일까.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