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랑아, 너와 함께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 성장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워. 이젠 파트너의 삶을 밝혀주는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비춰주는 존재가 되길 바랄게.”
26일 경기 용인시 삼성화재(000810) 안내견학교에서는 ‘퍼피워커(안내견이 될 강아지를 돌봐주는 자원봉사자)’의 손을 떠나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강아지들을 축하하는 분양식이 열렸다. 약 2년에 걸친 훈련과 사회화 과정을 마친 8마리의 강아지들은 이제 어엿한 안내견으로 성장해 각자 시각장애인 파트너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퍼피워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이 키운 강아지가 안내견으로 잘 자라 시각장애인 파트너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동과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분양식에서는 7~8년간의 안내견 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반려견으로 ‘견생 2막’을 여는 은퇴견 5마리의 은퇴 행사도 함께 열렸다. 이 역시 이별과 만남의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발표한 직후 첫발을 내디딘 삼성 안내견 사업이 올해로 32주년을 맞았다. 이 선대회장은 신경영 선언 석 달 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설립했다. 단일 기업이 운영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안내견학교다. 이듬해인 1994년 첫 번째 안내견 ‘바다’를 시작으로 이곳에서는 매년 15마리 안팎의 안내견이 양성돼 지금까지 총 308마리가 시각장애인들의 품에 안겼다. 현재 활동 중인 안내견만 85마리에 달한다. 안내견 훈련사와 예비 안내견들이 지난 32년간 훈련하며 걸어온 길은 약 86만 ㎞. 둘레 4만 ㎞의 지구를 21바퀴 돈 것보다도 더 긴 거리다.
이 선대회장은 미발간 에세이 ‘작은 것들과의 대화’에서 “삼성이 처음 개를 기른다고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며 “비록 시작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이런 노력이 우리 사회 전체로 퍼져나감으로써 사회의식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십수 년이 지나면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게 될 것”이라며 “안내견 사업이 우리 사회의 복지 마인드를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게 안내견학교가 야심 차게 문을 열었지만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기업이 안내견학교를 운영하는 사례가 전무했던 탓에 국내외 우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유럽과 미국의 선진 안내견 훈련법을 벤치마킹해 양성 시스템을 체계화한 결과 이제는 일본과 대만·홍콩 등지에서 훈련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선진 안내견학교 반열에 올랐다. 이 선대회장의 혜안과 뚝심이 빚어낸 성과였다.

삼성 안내견학교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퍼피워커 자원봉사자 가족들은 안내견이 되기 위한 강아지와 1년간 함께 지내며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은 물론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경험하는 기초 훈련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공공장소 출입을 거부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랑과 헌신으로 묵묵히 안내견을 길러냈다. 이 선대회장 역시 “한 마리 안내견이 성장하기까지 수억 원의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의 크기로 퍼피워킹을 해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다”며 “그 노력을 먹고 자라는 한 송이 국화가 안내견”이라고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퍼피워커 참여 가정은 1100여 가구로 늘었고 현재 신청하면 5~6개월가량 대기해야 할 만큼 인기다.
안내견학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제도 개선을 이끌기도 했다. 정부와 국회는 안내견 동반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과 공공장소 출입을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고 시각장애인과 동반 입출국하는 안내견에 대한 검역 절차도 간소화했다.

이날 네 번째 안내견으로 ‘태백’을 분양받은 시각장애인 파트너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안내견들은 파트너의 눈이 돼주고 가족이자 든든한 친구로 함께해왔다”며 “안내견들과 파트너들의 여정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지난해 전국장애인체육대회 10㎞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따낸 선지원 선수는 자신의 네 번째 안내견이 된 ‘나리’와 함께 무대에 올라 “제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안내견 나리와 함께라면 세상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문화 삼성화재 사장은 “안내견학교의 32년은 자원봉사자와 정부·지방자치단체 등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나된 걸음으로 노력했기에 가능했다”면서 “시각장애 파트너와 안내견이 사회 구성원으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사회적 환경과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도 병행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