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가장 이상적인 방식의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암연구소 이건희홀에서 만난 백승태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백 교수가 말한 연구는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유전체·기능연구 기반 희귀질환 진단지원 사업’을 뜻한다.
이날 서울대 암연구소엔 백 교수를 비롯해 관련 연구에 참여하는 의사, 과학자, 생명과학전공 학생 등 8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희귀질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전국의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는 이 워크숍은 2022년 10월 처음 열렸고, 매년 2~3회 개최돼 8회를 맞았다.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댄 유전체·기능연구는 미진단 희귀질환의 원인을 밝혀내는 데 필수적이다. 정확한 진단명조차 없는 병의 근원을 짚으려면, 먼저 환자의 유전체(전체 유전 정보)를 분석해 병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 변이부터 찾아내야 한다.
해당 돌연변이가 실제 병을 일으켰는지 검증하기 위해 유전자의 정확한 역할(기능)을 밝혀내는 게 이 연구의 목표다. 물고기·생쥐·닭·초파리 같은 동물이나 세포모델(실험용으로 만든 인공 세포 체계) 등에 인체 돌연변이를 주입해 질병과 유사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관찰한다.
이번 워크숍에선 실제 환자들에게서 발견된 유전자 변이로 인한 변화를 실험한 연구자 발표가 이어졌다. 이들은 이런 방식의 연구 협력이 2~3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예전에도 유전자 변이, 줄기세포 등을 분석하는 기초 과학자는 있었다. 하지만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 의료진과 밀접하게 소통하고, 환자를 함께 보며 연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2021년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유족이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에 써달라며 기부한 3000억원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사업단이 꾸려졌고, 현재 전국 25개 병원이 희귀질환 진단지원 사업에 참여한다. 그렇게 유전질환 원인을 찾는 전장엑솜분석(WES) 검사를 받은 환자와 가족은 누적 6067명(지난달 기준)에 달한다.
송미령 광주과학기술원 생명과학과 교수는 이 사업으로 분석 의뢰받은 환자의 유전자 변이를 세포생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송 교수는 "기초 과학자들에게 환자 관련 임상 데이터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소중한 정보"라며 "임상 현장에서 이를 공유해주는 게 연구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환자 정보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연구자 개인이 하기는 어렵다. 이건희 기부금 사업으로 가능해지면서 이 분야 연구의 깊이가 더해졌고 이전보다 체계화됐다"라고 덧붙였다.


백승태 교수는 "희귀질환 진단과 치료라는 하나의 큰 목표를 두고 서로 다른 전공자들이 합심하는 형태의 연구는 다른 과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특히 학생 연구원들이 이런 자리에 와서 교류하는 게 의미가 크다. 우리가 하는 연구가 단순히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실제 환자를 위한 일'이란 동기 부여의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여러 분야가 손잡은 이건희 사업단의 연구는 특히 다양한 방식으로 유연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빠르게 변화하는 연구 개념과 기술을 도입하기 좋은 플랫폼인 셈이다.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성과를 내야 하는 일반적인 연구 사업과 다른 점이다. 선웅 고려대 의대 교수는 "희귀질환 연구는 한 명의 연구자가 전체를 알아낼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은 협력 연구가 필수적"이라며 "판을 크게 짜 놓고 여러 연구자가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연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날 워크숍에선 희귀질환 진단에서 한발 나아가, 치료 기술개발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개발하는 배상수 서울대 의대 교수가 최근 합류하면서 치료법 모색이 가능해졌다. 배 교수는 "국가 지원 사업은
실패에 대한 고민이 커서, 주어진 과제 완수만 목표로 하는 한계가 있다"면서 "이건희 프로젝트는 창의적으로 연구 아이디어를 새롭게 구성하면서 과감하고 유연하게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업단에서 희귀질환사업부장을 맡은 채종희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는 "앞으로 희귀질환 진단을 넘어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등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하고, 관련 연구 인력 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