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공포
각본·연출·주연을 겸한 노에미 메를랑의 야심
공포스럽지만 섹시하면서도 코믹한 영화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마릴린 먼로 분장을 하고 싸구려 에로영화에 출연하는 무명 배우, 캠 앞에서 남자들이 요구하는 행위를 하며 돈을 버는 캠걸, 아직까지는 어떤 기약도 없이 작품을 쓰는 작가 지망생. 친구 관계인 세 여성이 찜통 같은 더위에 시달리는 한여름 밤에 마르세유의 아파트에서 뭉친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붉게 립스틱을 칠한 엘리제(노에미 메를랑)가 니콜(산다 코드레아누)과 루비(수일라 야쿠브)의 집에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그녀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해방감을 맛보면서 웃고 떠들고 방귀도 뀐다.

니콜은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 그리고 작가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싶은 욕구와, 남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는다. 발코니에 앉아 글을 쓰면서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세상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 루비는 열정적인 캠걸이다. 영화 시작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를 오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도발적이며 자신을 얕보는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대응한다. 성폭행이라는 고통을 겪고 난 뒤에도 친구들의 지지 덕분에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여하튼 세 여자가 뜨겁고 끈적거리는 여름밤에 한 집에서 뭉친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세 여성은 반대편 발코니에서 관심을 표해 온 사진작가의 초대를 받아 함께 어우러진다. 작가 지망생 니콜이 평소 눈여겨봤던 남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평범한 에로영화였을 것이다. 세 여성은 질펀한 밤을 보낸 뒤 시신으로 변한 남자를 두고 서스펜스와 스릴, 호러를 선사한다. 오프닝 장면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남자의 시체를 옮기는 장면은 코언 형제의 '파고'를 연상케 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 수상작이자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퀴어 로맨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배우 노에미 메를랑과 셀린 시아마 감독이 뭉친 영화다. 배우와 감독이 아니라 감독과 작가로 만났다. 노에미 메를랑이 각본·연출·주연까지 겸하고, 셀린 시아마가 공동 각본 및 제작을 맡았다. 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델 활동을 시작했던 17살 때 사진작가에게 당했던 언어적, 신체적 폭력과 사귀던 남성의 교제폭력 등의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라며 제작 계기를 밝혔다.
이 영화는 제77회 칸영화제에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 등이 소개된 바 있는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공개됐다. 액션, 스릴러, 느와르, 호러, 판타지 등 장르 영화 중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을 엄선해 초청하는 공식 부문에서 상영되면서 호평을 받았다. 나체와 시체가 난무하는 장면 속에서도 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관객들을 웃음 속으로 초대한다. 화려한 미장센과 강렬한 색감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을 연상시킨다.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나홍진 감독의 '곡성', '추격자'를 보면서 참고했다고 했다.

섹시하면서도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만 그리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장르적 재미는 물론, 웃음과 해방감, 그리고 성별 불문 깊은 메시지를 선물한다.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미투운동'의 구호가 느껴지기 보다는 여성의 몸과 바깥 세상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여성 연대, 바디 포지티브, 성폭력, 교제 폭력 등의 주제를 다루지만 페미니즘 영화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소 거칠지만 흡인력 있는 여성 감독의 영화가 아닐 수 없다. 9일 개봉. oks3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