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성인지, 개인의 성향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2025-09-15

열린광장

바느질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태어날 아이의 애착 인형이 될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태교 삼아 정성을 다해 분홍색 예쁜 토끼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만든 인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촌오빠가 갖고 놀던 찌그러진 장난감 경찰차를 애착인형으로 선택했다. 자다가도 울면서 경찰차를 찾고 손에 꼬옥 쥐고서야 다시 안심하고 잠들곤 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치마를 입혀주면 놀 때 걸리적 거린다며 자기는 치마를 입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산책을 하면 길바닥에서 공벌레를 몇 마리 잡았는지 늘 자랑하곤 했다. 개구리, 지렁이, 매미 껍질, 개미, 가제, 잠자리, 사슴벌레 뭐 이런 것들이 그렇게 이쁘다며 심지어 죽어있는 지렁이를 보면 사람들이 밟지 않게 길 한쪽 옆으로 옮겨 놓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씩씩한 매력을 가진 아이를 낳았구나 싶었다.

그러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가 생겼다며 내일 사귀자고 고백을 할 작정이란다. 아이의 고백은 성공했고 남자친구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매일 남자친구 교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돌봄 교실로 가는 길이 우리 아이의 데이트 코스가 됐다.

출근 준비로 분주한 내게 슬쩍 와서는 입술이 말라서 아프다며 엄마 립스틱 좀 발라봐도 되냐는 아이에게 옅은 립스틱 하나를 골라주었다. 입술을 쪼옥 내밀고 아주 정성스럽게 바르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여자아이였다.

어느 주말, 친정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이의 첫 연애 소식을 알렸다. 여기저기서 공분이 일었다. ‘왜 네가 먼저 고백을 했냐’부터 ‘왜 네가 남자친구를 기다리냐 그러면 안 된다. 남자가 기다리게 해야지’라며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연애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훈수를 두었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운 아이는 화가 잔뜩 나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친척들은 이상해. 좋아하는 사람이 고백하는 거지 왜 꼭 남자가 먼저 고백해야해? 보고 싶으면 내가 가서 기다릴 수 있는 건데 왜 남자친구가 기다리게 하라고 그래?” 뭐라고 답변해 줘야 하는지 순간 난감했으나 “아~ 친척들은 너가 사랑받은 여자친구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들 이야기 한거겠지”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난 그런 거 싫어, 내가 좋으면 되는 거지 왜 여자가 먼저 하면 안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성인지적 관점은 엄마인 내가 가르쳐 주기도 전에 어느새 멋지게 형성돼 있었다. 얼마전 “엄마, 남자는 나중에 군대를 가야 한대. 그런데 여자도 원하면 군대에 갈 수 있대” 라고 말했을 때도 학교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잘 교육시켜 주고 있구나 싶었다.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성향이 그러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성인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서 배웠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우리사회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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