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만취 차량이 앗아간 아빠의 다리, 일상이 멈췄다 [탐사기획-당신이 잠든 사이]

2025-12-14

(1회) 죽거나 다치거나

김석곤씨의 고통

억척스러운 삶

칠십 목전, 아픈 아들 위해 “일 년만 더”

여느 때처럼 정신없던 밤 ‘쾅’ 굉음이 때렸다

마르지 않는 눈물

홀로 아이 키우던 가해자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소”

탄원서 써주고 용서했지만 송두리째 바뀐 삶은 ‘막막’

회사와는 보상 놓고 힘겨운 싸움…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

아버지는 다리가 튼튼한 사내였다. 건실한 몸은 그의 유일한 밑천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십 남매의 입 하나라도 덜어보고자 전북 임실 산골 마을을 떠나 처음 상경했을 때도, 막노동판을 구르다 구로동 럭키아파트 경비복을 입었을 때도, 불혹을 넘긴 나이에 쓰레기 청소차의 뒷발판에 올라섰을 때도 그는 두 다리로 버텨내는 세상이 거뜬했다.

내일모레면 칠순인 김석곤은 서울 구로구 새벽 골목길의 가로등이 희미할 때도 5t 청소차 뒤에 매달려 힘차게 ‘오라이’를 외쳤다. “목소리가 커서 주민들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는 그는 쓰레기를 보면 사뿐히 뛰어내려 봉지를 두 손 가득 들고 적재함을 향해 던졌다. 똑같은 동작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 6일, 쉬지 않고 밤새 반복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집어삼키는 압착진개차의 회전판 앞에서 가장의 무게를 버텨온 그는 미련하리만치 요령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직장 동료였던 황보창민은 아버지뻘인 석곤에 대해 “항상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낙엽이나 눈을 치우는 가욋일에도 누구보다 앞장서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인자 일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딱 1년만 더 하고, 내 나이 칠십까정만 채우고 그만둘랑게.”

마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아이 같은 아들은 출근을 앞둔 아버지를 붙잡았다. 석곤은 투박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년을 훌쩍 넘겨 촉탁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도 고작 일 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곤이 여태껏 이 거친 밥벌이를 놓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아들 종현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데다 군대에서 선임의 구타로 지적장애 3급 판정까지 받은 아들, 그 ‘아픈 손가락’이 늙은 가장을 위태로운 생업의 발판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2년 전 어느 여름 아침 퇴근길. 그날 석곤은 구로시장 골목에 있는 목욕탕에 들르지 못했다. 하필 월요일 정기휴무일이었다. 진한 참기름 향이 배어 있는 좁은 골목. 이른 새벽 아직 셔터를 올리지 않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몇몇 가게의 주인은 진열대를 덮은 마대를 걷어낸다. 6000원짜리 칼국숫집과 생마늘이 수북한 야채 가게 골목을 지나면, ‘목욕합니다’ 입간판이 놓인 ‘신호목욕탕’이 나온다. 70평 남짓한 4층짜리 건물은 34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먹은 듯 낡았지만, 그 덕에 익숙하고 편안했다.

석곤은 평소 1층 카운터에서 목욕비 1만원을 치르고 열한 계단을 밟아 2층 탈의실로 올라간다. 빛바랜 신발장에 운동화를 밀어 넣고 작업복을 벗을 때, 15인치 텔레비전에선 밤새 벌어진 사건·사고를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발소와 덜거덕거리는 녹슨 운동기구가 있는 낯익은 풍경. 다시 열다섯 계단을 더 올라 3층 남탕에 들어서면, 비로소 석곤의 시간은 멈춘다.

수증기가 가득한 남탕 문을 열면 세신사가 먼저 보인다. 그 옆으로 2.5평 남짓한 작은 사각형의 온탕이 석곤을 기다린다. 40도가 채 되지 않는 온탕에 몸을 담그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노동의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석곤에게 냉탕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석곤은 늘 목욕탕 벽에 붙은 ‘몸을 씻고 들어가세요’ 팻말을 힐끔 쳐다봤다. 혹여 세상의 편견이 그곳까지 따라온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몸이 노곤해지면, 목욕탕 구석의 간이 수면실로 향했다. 미약한 온기만 있는 타일 바닥에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잠시 눈을 감으면 간밤의 노동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보낸 뒤에야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유일한 취미가 목욕일 겁니다. 일 말곤 다른 걸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석곤과 십수 년을 함께 일한 갑장의 동료 상차원 한대현의 말처럼 석곤에게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일 그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종현은 그날 저녁을 차려왔다. 4년 전 석곤의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자만 마주 앉은 밥상은 된장찌개와 김치, 시장에서 산 밑반찬 몇 개가 전부였다. 밥 한 공기를 금세 비운 석곤은 “다녀오마”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이것이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굽은 골목, 주황색 가로등이 모두 켜진 2023년 7월24일 저녁 8시, 석곤은 낡은 자전거 페달을 두 발로 저으며 출근길에 올랐다. 낮 최고기온 31도, 해가 지고도 채 식지 않은 열기가 뺨을 스쳤다. 회사에 도착해 동료들과 믹스커피 한 잔을 입안에 털어놓고는 20분 만에 수거 작업에 나섰다.

7호선 남구로역 4번 출구 앞 오르막길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석곤은 운전원 유충기가 모는 음식물 수거차의 뒷발판에 올라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더위 탓에 가슴팍 지퍼를 내려 땀을 식히던 찰나였다.

“콰앙!”

굉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혈중알코올농도 0.202%. 만취한 40대 운전자가 모는 검은색 승용차가 청소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무방비로 있던 석곤의 다리가 차가운 쇳덩이 사이에서 으깨졌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뒷발판 탑승은 불법이지만 밤사이 쓰레기를 모두 치워야 하는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스팔트 위로 붉은 피가 흥건히 고이는 동안, 차들은 무심히 석곤의 옆을 지나갔다.

“경찰입니다. 김석곤씨 가족 되시죠? 뼈가 좀 보이는데…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어리둥절한 종현은 택시를 잡아타고 동작구 보라매병원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단순 골절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한 무쇠 같은 아버지였으니까. 응급실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다리는 으깨지고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버틸 수 있는 무쇠 다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절단해야 합니다.”

보라매병원 응급실 당직의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고개를 떨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곳에선 수술이 여의치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 수술할 병원을 찾아 헤맸다. 나흘 전 서울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된 국립중앙의료원이 가까스로 석곤을 받아줬다. 종현은 자정을 넘긴 0시57분, 아버지의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 1시35분, 국립중앙의료원 소생실에서 석곤을 처음 만난 외상외과 소속의 전문의 김미나는 진료차트에 ‘다리 으깸 손상, 경골·비골(무릎부터 발목까지의 다리뼈) 개방성 골절’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석곤의 가족들에게 절단의 불가피성에 관해 설명했다. 의사들은 이를 ‘나쁜 소식 전달하기’라고 부른다. 김 전문의는 “절단은 환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굉장히 큰 일이다 보니 설명하는 데 힘들고 괴로웠다”고 했다.

수술 준비가 끝난 건 새벽 2시56분이었다. 집도를 맡은 정형외과 전문의 이재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장 큰 문제는 외상성 쇼크였고, 출혈이 많아 사망 위험이 컸습니다. 혈류가 끊겨 다리가 매우 차가웠어요.”

석곤의 다리는 오금 아래로 혈관이 터지고 근육이 뒤틀려 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리뼈는 크게 세 조각, 발목 쪽은 셀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절단 가능성을 판단하는 ‘중증사지손상(MESS) 점수’는 9~10점. 7점 이상이면 절단이 환자의 생명에 유리한 선택이다.

수술실 무영등의 차가운 불빛 아래, 집도의 재현은 지독하게 뭉개진 석곤의 다리를 갈색 무균 필름으로 감싸고 소독한 뒤 수술포를 씌웠다. 더 이상의 출혈을 막기 위해 오금으로 주행하는 동맥을 클램프(물체를 조아서 고정하는 도구)로 꽉 잡은 뒤, 이미 형체를 잃은 무릎 아래를 먼저 떼어냈다. 묵직한 왼쪽 다리를 두 손으로 들어 수술대 밖으로 옮겼다.

다음 단계로 무릎 관절 위,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을 남기고 메스로 근육을 갈랐다. 수술용 진동 톱으로 허벅지 뼈를 가르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수술실을 채웠다. 톱날의 마찰열에 뼈 조직이 타버리지 않도록 식염수가 쉴 새 없이 뿌려졌고, 통증을 기억할 신경은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새 칼날로 단칼에 끊어냈다. 칠십 평생 가장을 지탱해 온 기둥이 그렇게 잘려 나갔다.

날카로워진 뼈 단면을 둥글게 갈아내고 그 위를 근육과 피부로 당겨 덮어 한 땀 한 땀 꿰맸다. 솜 붕대와 탄력붕대로 지긋이 상처를 눌러 덮었다. 오전 6시10분, 평소라면 동이 트고 쓰레기 수거가 끝났을 시각, 대퇴부 절단 수술이 마무리됐다.

“찌릿찌릿해서 잠을 잘 못 잔다.”

사고 후 2년이 흘렀지만 석곤은 지금도 흐린 날이면 왼쪽 발끝이 욱신거린다. 절단 환자의 65%가 겪는다는 환상통(幻想痛)이다. 다리는 사라졌지만 신경이 당시를 기억하는 것이다. 석곤은 요즘도 자다가 허공에 팔을 휘젓는 날이 있다. 아직도 밤마다 쓰레기를 치우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때 그냥 죽어버렸으면… 살아서 뭐 하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일상의 상실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이어진 긴 병원 생활,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석곤은 수없이 되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산업재해 인정은 됐지만, 한쪽 다리로만 살아갈 날이 아득했다.

단짝이던 동료 대현은 수술이 끝나고 닷새 만에 병원을 찾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던 때라 석곤은 당시 기억이 흐릿하다. 두 사람은 병실에서 20분간 연신 “이제 어떡하느냐”라는 말만 반복하며 눈물을 글썽여야 했다.

석곤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가해자를 용서했다. 병실을 찾아와 무릎 꿇는 가해자에게 “자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 않으냐”며 오히려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그의 사정을 듣고는 아들 종현이 떠올라 탄원서까지 써줬다. 그 덕에 음주운전, 도주치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는 지난해 5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구로2동 사람들은 석곤네 부자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부자가 살던 1997년 지어진 10평짜리 임대주택 앞집에 사는 신경순은 “부자가 인사성이 참 밝았다”고 했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보충대 슈퍼 주인 김복연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아들이 아버지 출근 전에 600원짜리 ‘레쓰비’를 사러 종종 왔었는데 안타까워 어째.”

석곤은 끼니를 해결할 때도 도통 싫증을 내지 않았다. 아침 퇴근길이면 회사 장부식당인 ‘서태자 김밥집’에 들러 아침으로 갈비탕을 시켰다. 미화원 동료들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핀잔을 줬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정식당에선 비빔밥을 줄곧 먹었다. 그는 “국물만 있으면 뭐든 맛있게 먹는다”고 했다.

석곤은 지난해 5월 둘째 아들이 사는 전주로 이사했다. 지난 10일 완산구 평화동 주공아파트 1층 자택에서 만난 석곤은 당시를 “뼈가 바사삭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사고 장면을 떠올린 순간 오른쪽 다리를 거실 바닥에 쾅쾅쾅쾅쾅 다섯 번이나 굴렀다.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었다.

석곤의 왼쪽 바짓단은 허공에 펄럭이지 않도록 고무줄로 야무지게 묶여 있었다. 침대이자 의자인 거실 소파 옆에는 효자손과 리모컨,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삼킨다는 빨간색 타이레놀 한 통이 손 닿는 거리에 놓여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갈라치면 석곤은 방바닥에 내려와 두 손으로 마루를 짚고, 아기처럼 엉덩이와 다리를 질질 끌며 현관으로 향했다. 외출용 의족은 칠순 노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이제는 종현이 그 다리를 들어줘야 했다.

석곤은 지난달 말 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의족과 목발을 챙기는 건 종현의 몫이었다. 친지와 옛 동료들도 만났다. 밤새워 일하고 낮이면 자야 하는 동료들과는 짧게 조우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구로동 우체국 앞을 석곤은 혼자 서성였다.

“목발을 짚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다니고 있으면, 청소차가 지나가. 그럼 얼굴 보고, 인사하고 그러지. 그 사람들 일 하는데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어.” 이들에게 여유로운 휴식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석곤은 평생 일터였던 D환경을 찾아가진 못한다. 아직 보상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만 가면 합의해달라고 오는 통에 다시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목욕탕도 가지 못한다. 그는 “목발 짚고는 미끄러워서”라고 했다. 석곤의 새 보금자리, 직사각형의 좁은 욕실에는 이동식 욕조가 하나 놓였다. 매끈한 하얀색 플라스틱 재질의 간이 욕조다. 이제는 이 차가운 플라스틱 통이 구로동의 온탕을 대신한다. 신호목욕탕 주인 조정기는 석곤에 대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누가 교통사고로 다쳤다고 알려줬다. 늘 사람 좋은 인사를 나눴는데 인생이 참 얄궂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현관에 의자를 놓았다. 외출할 때 신발을 신고 목발을 짚는 곳이다. 석곤은 아들과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걸으며 산책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년이 넘는 재활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팔이 더 튼튼해졌다.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겨드랑이 사이에 목발을 끼우고 걸을 때면 어느새 힘이 들어가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다시 소파에 올랐다. 말없이 현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짝을 잃어버린 오른쪽 운동화 한 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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