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자해행위 업무상 재해 인정 확대 경향
“의학적 증명뿐 아니라 상당인과관계 경우도”
#A씨의 남편은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호소해 오다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는 명백한 산업재해라고 봤다. 다만 남편이 우울증 등을 앓은 전력이 없고, 이를 증명할 의학적 기록 역시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A씨는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확실하다고 생각했으나 근로복지공단도 이를 인정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판례에 따르면 A씨 남편처럼 우울증 상담 등 의학적 소견서 없이도 자살이 산재로 인정될 수 있다. 특히 2020년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개정돼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인정 기준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개정되면서 산재 인정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지난해 3월 서울고등법원은 출장 일로 정신적 압박을 받은 노동자가 자살시도 끝에 사망하자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입사한 지 1년 남짓 된 고인은 2017년 11월 부사장, 상무 등과 미국 출장에 동행했다. 영어 실력이 미숙했기에 입국 심사가 1시간 이상 걸렸다. 일정에는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 일에 대해 임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았고, 귀국 뒤에는 심적으로 의지하던 직속 상사가 갑작스레 휴직해 더 의기소침해 했다. 고인은 2018년 1월 자택에서 자살시도를 했고, 병원 후송 이후 의식 회복 없이 그해 3월 사망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불인정하며 유족급여를 거부하는 처분을 내렸다. 유족은 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를 제기했다. 소송 결과 1심은 공단 손을 들어줬으나 2심은 이를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상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이 확대되고 있는 점과 고인이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은 점을 따져 고인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의학적 소견이 없거나, 정신병적 증상이 없다는 점을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를 에워싼 주위 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 고려해야 한다”며 “자살 직전 환각 등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해 달리 볼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업무와 사망 간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한 근거는 주변인들에게 털어놓은 고인의 심정이다. 고인은 동료 사원들에게 “출장 가서 힘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이 정도밖에 안 되네”라며 자책하는 발언을 발복했다.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심각하게 우울증이 온 것 같아. 아무것도 못 하겠어.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든다’ 등으로 직접적인 위기의식을 표출했다.
재판부는 입국 심사 지연 등으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주원인이 돼 우울증세가 발병했다고 봤다. 공단 측은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증명돼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으나,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도 증명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 설명이다. 2020년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을 정한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개정돼 인정 기준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바뀐 점이 고려됐다.
2심 판결 뒤 근로복지공단은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심리불속행 기각(2심 판단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없다고 보고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절차)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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