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지렁이를 구했습니다

2025-11-16

경기도에 사는 30대 활동명 ‘어년’씨는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구조 대원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매년 6~9월 한여름, 구조는 혼자서 한다. 구조 장비는 나뭇가지 하나뿐이지만, 10초만 품을 들이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그가 초등학생 때부터 구조해 온 대상은 ‘지렁이’다.

“지렁이 구조,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구조활동”

“비가 내린 날에는 평균 10마리 넘게 구해요. 비가 오지 않아도 촉촉한 길 근처나 도보 위에는 지렁이가 많이 있지요. 편의점을 가거나 산책을 할 때도 1~2마리씩은 꼭 구하는 편입니다.”

여름철 길가에 흔한 지렁이는 쉽게 죽는다. 땅 속에 살던 지렁이는 비가 오면 물이 차 숨쉬기가 힘들어 밖으로 나온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볕이 내리쬐면 열기에 몸이 말라 죽는다. 극한 폭우와 폭염이 반복된 지난 여름은 지렁이에게 치명적이었다. 말라죽기만 한 게 아니다. 지렁이는 흙을 찾아 가는 길에 사람의 발이나 각종 바퀴에 밟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지렁이가 사라진다면 도심 생태계는 중요한 ‘토양 엔지니어’를 잃게 된다. 지렁이는 땅 속을 헤집어 식물 뿌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길을 낸다. 흙 속 유기물을 먹고 영양분이 가득한 분변토를 만들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지렁이 스스로 새 보금자리를 찾기는 버거운 일이지만,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지렁이를 흙이 있는 그늘진 곳으로 옮겨놓으면 다시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어년씨는 “지렁이 구조는 ‘길 위에 있는 지렁이를 흙 위로 옮긴다’라는 아주 쉬운 행동이라 부담이 없다”며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이나 어른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렁이 구조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어년씨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구조대 모집 게시글에는 동참하겠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어년씨의 활동을 지켜본 주변 지인들도 구조 활동에 나섰다.

올여름에는 조직적인 ‘구조대’ 활동도 활발했다.

지렁이 구조대 ‘꿈틀단’ 소속 김지연씨(경기 동두천시)는 여름 내내 땅 바닥을 보고 다녔다. 보도블록이 깔린 곳은 더 공을 들여 살폈다. 김씨는 “보도블록에 딱 끼어있는 아이들은 더 찾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유심히 보는 거죠. 틈에 끼인 아이들이 있으면 나뭇가지로 집어 흙이 있는곳으로 옮겨줍니다”라고 말했다.

지연씨가 속한 꿈틀단은 지난 6월 서울환경연합에서 모집한 ‘지렁이 구조’ 모임이다. 66명이 꿈틀단에 가입 신청을 했고 이 중 55명 가량이 구조 활동을 벌였다. 대부분 3회 이상 지렁이를 구했고, 김씨처럼 한번에 5마리 넘게 구하는 단원도 많았다. 꿈틀단 공식 활동 기간인 6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최소 200마리 넘는 지렁이의 목숨을 구했다.

꿈틀단원들은 서울과 인천, 경기 동두천 등 각지에서 구조 활동을 이어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됐다. 함께 활동일지를 쓰며 노하우를 공유했고, 구조한 지렁이가 개미떼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나누며 다같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지렁이 구조 활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별난 사람’으로 보일까 망설인 순간도 있었지만, 꿈틀단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버팀목이 됐다.

김씨는 “큰일은 아니지만 작은 생명을 구했다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며 “구조 활동만으로도 자존감이 높아진다. 앞으로도 환경에 보탬에 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가에서도 지렁이 구조 활동은 작은 물결처럼 번졌다.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4학년 학생 5명은 지난 6월부터 ‘지렁이 구하기 대작전(이하 지구대)’ 팀을 꾸려 지렁이 구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캠퍼스에 지렁이 구조 도구함 두 곳과 임시 보호소를 마련했고, 틈틈이 구조 활동 사진을 SNS에 올리며 소식을 전했다.

예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구조 소식을 접한 학생들은 구조에 동참했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 준 시민도 적지 않았다. 반응에 힘입어 지구대는 지렁이 구조 열쇠고리(키링)을 만들어 배포했다. 적당한 나뭇잎이나 나뭇가지가 없을 때 요긴한 키링으로 지렁이에 무해한 밀랍천으로 제작됐다.

지구대 활동에 참여한 윤서연씨(25)는 “꼭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목표는 아니었고, 그저 작은 지렁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시작한 활동”이라며 “지렁이 구하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누군가의 구조 활동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렁이 구조 활동, 개인·학교·시민사회로 퍼져나가

이화여대 환경교육연구실도 지렁이 구조에 동참했다. 예비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생태 감수성 향상 프로그램에 ‘지구대’ 팀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고 지렁이 구조의 의미와 방법을 공유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예비 교사들이 각자의 학교로 돌아가면, 자연과 생명을 살리는 작은 실천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워크숍을 기획한 엄세원(31)씨는 “세상에 작은 생명체에 관심을 가지는 게 너 뿐만이 아니야’ 라는 생각의 공감대를 얻고 함께 활동할 에너지를 얻고자 워크숍을 열었다”며 “앞으로도 모든 생명체를 위하는 마음, 생태 정의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을 꾸준히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들도 죽어가는 지렁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인천 도담초등학교 4학년 학생 90명과 대구·통영 등 타학교 14개 학급 학생들은 지난 6월부터 지렁이 구조 활동을 벌였다. 조막손에 지렁이가 다치지 않도록 종이로 만든 구조 키링도 만들었다. 지렁이는 열에 취약해 사람의 손의 열기에도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이준서군(인천 도담초 4학년)은 “지렁이는 아무 대가 없이 우리 땅을 좋게 해주는데 말라 죽거나 밟혀 죽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며 “어른들도 동물이나 곤충에 관심을 기울여 주고, 길에서 죽어가는 동물을 구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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