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고 권력자’와 ‘세계 최고 부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상상만 했던 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격돌로 현실화하고 있다.
‘정략결혼’이 파국으로 끝나면 거대한 위약금이 오가는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과 머스크의 결별에도 엄청난 판돈이 걸려있다. 외신들은 둘의 싸움이 미국 정치와 경제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11월 치러질 중간선거에서 머스크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을 위해 2억7500만달러(약 3600억원)를 썼던 머스크는 내년 선거에도 1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머스크가 약속한 자금을 집행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오히려 공화당의 반대편에 그만큼의 자금을 지원할 수도 있다.
트럼프는 동맹에서 적으로 변한 머스크의 분노와도 싸워야 한다. 머스크는 트럼프가 이제까지 상대해 온 정적들과 다르다. 머스크는 트럼프보다 소셜미디어 사용에 능수능란하고, 트럼프만큼이나 무자비하고 직설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머스크가 반(反)트럼프 여론몰이에 나설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받을 타격은 더 커질 수 있다. 마가(MAGA) 핵심 지지층은 동요하지 않겠지만, 충성도가 덜한 지지층에는 악재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 측근은 “트럼프의 정치 고문들은 이 싸움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며 “이들은 (머스크를 필두로 한) 테크 권력과 (트럼프를 위시한) 정치 권력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러나 머스크가 잃게 될 것도 만만치 않다. 머스크가 소유한 스페이스X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 항공우주국(NASA)과의 협력사업 등 연방정부 계약을 잇달아 수주하며 큰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모욕을 당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 트럼프가 이제는 머스크의 사업체에 어떤 보복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우리 예산에서 수십억달러를 아끼는 가장 쉬운 방법은 머스크와의 정부 보조금 계약을 끊는 것”이라며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트럼프의 보복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커지면서 이날 뉴욕 증시에서 테슬라 주가는 14% 이상 급락했다.
게다가 최근 뉴욕타임스의 추적 보도로 머스크의 상습적인 약물 사용 의혹이 커진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머스크 개인에 대한 수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스티브 배넌은 “머스크는 불법체류자”라며 “그를 즉시 이 나라에서 추방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싸움이 격화될수록 그로 인한 피해는 양측 모두에게 돌아간다. 일례로 트럼프 대통령이 스페이스X와의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엄포를 실행에 옮기면, 미국의 우주계획과 군사정보 수집에 큰 차질이 생긴다. 스페이스X의 공백을 메울 대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랑해온 미사일 방어시스템 구축 계획 ‘골든 돔’ 구상에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하며,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스타링크’ 역시 즉각 대체가 쉽지 않다.
특히 스페이스X의 ‘크루 드래건’ 우주선은 현재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우주인을 보낼 수 있도록 당국 인증을 받은 유일한 미국 우주선이다. 이 우주선의 변형 버전인 ‘카고 드래건’은 보급품을 ISS에 실어나르는 역할을 한다. 머스크가 트럼프의 엄포를 맞받아치며 “드래건을 퇴역시키겠다”고 한 공언을 실천에 옮길 경우 미국은 ISS에 우주인을 보내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이를 의식했는지 머스크도 한 엑스 이용자가 “(트럼프 대통령과 당신은) 둘 다 이것보다 나은 사람들이니 진정하고 며칠 물러서서 생각해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내자 “좋은 조언이다. 드래건을 철수하지 않겠다”는 답글을 달았다. 헤지펀드 억만장자 빌 애크먼이 “조국을 위해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고 올린 글에는 “당신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은 민주당이다. BBC는 “한때 민주당의 후원자였던 머스크를 다시 품을 의향이 있는 (민주당)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옛말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전략가 리엄 커는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이건 제로섬 게임”이라며 “머스크가 민주당과 가깝게 움직일수록 공화당에는 해가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머스크가 트럼프를 비난하기 위해 폭주하며 올린 엑스 게시물 중 “트럼프의 이름이 ‘엡스타인 파일’에 있으며, 이게 (파일을) 공개하지 않는 진짜 이유”라는 폭로성 주장에 당장 화답했다. 액시오스는 민주당 하원 의원 2명이 팸 본디 법무장관과 캐시 파텔 미 연방수사국 국장에게 서한을 보내 “엡스타인 파일을 더 빨리 공개하고, 머스크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