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현(45)이 그림책을 냈다. 가수와 배우를 오가는 만능 엔터테이너에서 최근 영화감독으로까지 데뷔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걸까.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더 넓어졌다. 모든 것에 공감대가 깊어졌다”고 말하는 이정현을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림책에도 영화에도 넓어진 그의 시선이 담겼다. 그림책 <몽글몽글 숲속 요리사>는 이정현이 글을, 소금이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울창한 녹나무 숲 한가운데 사는 ‘서아’라는 여자 아이다. 귀여운 강아지 토리와 함께 사는 아이는 어느 날 아픈 고양이를 발견하고 돌본다. 요리가 취미인 아이는 고양이에게 따뜻한 밤 수프를 만들어 내준다. 책 안에서 밤 수프는 가을이라는 계절, 그리고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상징한다.
이정현이 2022년 낳은 첫째 딸의 이름도 서아다. 그는 “동화 작가가 아니다 보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기 어려웠다. 실제 집에서 함께 사는 강아지 토리와 서아를 이용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요리도 서아랑 내가 집에서 자주 하던 것들 중 쉬운 것을 골라 넣었다”고 말했다.
고양이를 돌본다는 이야기의 큰 줄기도 경험담이다. 그는 “예전에 살던 집 뒤뜰에 가끔 길고양이들이 찾아와 울었다. 아이가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에 서아와 함께 가서 보곤 했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면 도망갔다”며 “서아에게 ‘고양이가 아픈 것 같은데 어떡할까’ 물어보니 ‘일단 먹이를 좀 줘’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사료를 사다 뿌려주곤 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그림책이 정식 출간됐다. 서아의 반응은 어떨까. “요즘 책을 매일 안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책 읽어 달라며 ‘이거 하자’라고 말한다. 힘들다”고 웃었다.
사실 그림책은 이정현도 좋아한다. 그는 “딸 다섯 집의 막내였다 보니 부모님 책을 많이 못 사주셨다. 어릴 때 디즈니 컬렉션이 유행이었는데 사지는 못하고 집 앞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어른이 되서 그게 생각 나 서아를 임신하고 아이 핑계로 샀다. 서아 그림책을 같이 본다”며 “그림책은 창의성을 길러주고 삶의 교훈을 자연스럽게 전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사계절 요리 그림책’ 시리즈의 첫 권으로 앞으로 총 세 권이 더 나온다. 계절마다 어울리는 요리와 그에 알맞은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원고 작업은 이미 끝냈다. 이어질 시리즈에 대해선 “겨울엔 고구마 파이, 봄엔 한라봉 젤리, 여름엔 수박화채로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힌트를 줬다.
책의 인세는 어린이 병원에 전액 기부할 예정이다. “나이가 있다 보니 고위험 산모인지라 첫째와 둘째 두 번의 출산을 대학병원에서 했다. 입원하고 둘러보니 아프고 힘든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재밌던 책인데, 수익도 의미 있는 곳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기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엄마라는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또 다른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다. 최근 그의 감독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은 단편 영화 <꽃놀이 간다>에도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개인적 경험이 녹아있다.

영화는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딸 수미를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현실을 조명한다. 202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 낡은 목조주택에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생활고로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된 ‘창신동 모자 사망사건’에서 출발한 영화다.
그는 “당시 뉴스를 보고 상당히 우울했다. 사회적인 비극을 영화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지 생각하다 내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꽃놀이를 그렇게 가고 싶어하셨던 것이 생각나서 그것과 연결해봤다”며 “창신동 모자 사건 당사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이야기에 빗대어서 풀어내다보니 그래도 이야기가 써졌다”고 말했다.
직원이 그뿐인 1인 제작사 ‘와필름’도 차렸다. 제작사 이름에 가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넣었은 것은 왜일까.
“영화 ‘꽃잎’으로 데뷔해서 활동했지만, 어르신들은 배우보다 ‘바꿔’와 ‘와’의 이정현을 더 기억하신다. 과거엔 가수 이미지를 지우려고 무대도 안 한 적이 있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 영화계도 지금은 그런 것에 더 개방적이다. 무엇보다 대중들이 이리 좋아하는데, ‘복이다’ 생각하고 잊지 말고 함께 가자고 생각했다.”
현재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 그는 “졸업 작품으로 생계형 범죄를 소재로 한 단편 영화를 하나 더 준비 중이다. 후반 작업 중인데,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첫 작품보다 밝고 재밌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