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꼭 팝콘처럼 말한다.” 술자리에서 친구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본 안주로 나온 팝콘이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글쎄, 무슨 말일까?” 친구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팝콘 몇알을 들고 있던 손이 괜히 무안해졌다. 가까운 친구였기에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달콤하고 고소하게 말한다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다른 친구의 말에 옥수수 알갱이 같은 웃음이 팡팡 터졌다.
팝콘을 씹으며 그 말을 곱씹어보니 팝콘처럼 말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듯도 싶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른다는 거지?”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어떻게 튈지도.”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말을, 나는 지금껏 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 아까 처음에 캠핑 이야기를 하던 거 기억나지? 그게 모닥불로, 모닥불이 다시 무더기를 거쳐 갑자기 탈세 방송인 무더기 적발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잖아.” “아마 5분이 채 안 걸렸지?” 다른 친구의 말에 사방으로 실소가 튀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친구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건 화제가 쉼 없이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산만하긴 한데,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많아.” 옥수수 알갱이를 튀기면 팝콘이 튄다. 튀김과 튐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찰나, 다른 친구가 팝콘 몇알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팝콘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잖아. 어떻게 튈지 모른다는 건 아마 이 얘기겠지?” 칭찬과 비난이 교묘하게 섞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잇새에 낀 팝콘 껍질을 얼른 빼고 싶었다.
말할 때 나는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를 좋아한다. 갈래갈래 뻗어나가는 길 중 하나를 골라 진득하게 걸어가면 좋으련만, 거기서 도중에 맞닥뜨린 광경에 마음을 내주기 일쑤다. 조약돌 하나, 꽃 한 송이, 교통표지판이 또다시 샛길을 낸다. 샛길이 마치 새길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선뜻 발 들이고 신나게 누빈다. 팝콘처럼 말할 때는 무엇보다 귀환이 중요할 텐데, 강연할 때 청중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번번이 내 발목을 잡는다. “제가 어디까지 했었죠?” 팝콘이 너무 멀리까지 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팝콘 부스러기를 단서 삼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이 늘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팝콘처럼 말하는 과정에서 미처 터지지 못한 알갱이, 너무 익어서 타버리고 만 알갱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로 어떻게 튈 줄 몰라 튀겨지기를 거부한 알갱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새길에 매혹된 나머지, 원래의 길에서 이탈하고 마는 때도 잦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다리를 마련하지도 않은 채 왜 얼른 따라오지 않냐고 채근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된다. 빵 하고 튀어 오르는 팝콘에 온 신경을 기울인 나머지, 팝콘의 재료가 옥수수임을 까맣게 잊었던 적도 많았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 호프집에서 개업 선물로 팥시루떡을 받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친구의 말에 그건 공교로울 때 쓰는 표현이라고 군소리를 얹으려다가 멈추었다. 사람의 관점에서 장날의 장은 혼잡하게 느껴지지만, 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활기일 테니까. 나는 떡가루에 삶은 팥을 섞어 시루에 켜를 안치고 그것을 천천히 찌는 장면을 떠올렸다. 말이 튀김이라면 글은 찜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나는 타오름과 뭉근함, 그 사이를 바지런히 오가다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옥수수를 팝콘으로 먹기도 하지만, 그것을 쪄 먹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천천한 상태와 기꺼이 가까워질 시간이다. 천천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천천히 받아적어야지. 급히 말하느라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팝콘을 떠올려야지. 알갱이가 알맹이가 될 수 있도록 천천히 쪄야지. 속까지 잘 익혀야지. 그날 집에 가는 길은 꼭 새길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