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지~” “마이 그린 라이트”
처음 듣는 넘버임에도 감미롭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귀에 착착 감겨 공연이 끝난 뒤에도 흥얼거리게 된다.
‘어쩌면 해피엔딩’보다 먼저 2024년 토니상 의상상을 수상하며 한국인 프로듀서의 저력과 가능성을 증명했던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에 이어 한국에 상륙했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아시아인 최초로 브로드웨이에서 단독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례 없는 경제 성장으로 풍요로움과 타락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던 192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한편 당대의 여성상과 사랑에 대한 고민을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점이 현지 관객들로부터 공감과 호평을 이끌어냈다.

뮤지컬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백만장자가 된 제이 개츠비가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옛 연인 데이지를 되찾으려 매일 밤 파티를 열면서 시작된다.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의 성공 스토리는 신문 1면을 잇달아 장식하고 유명 인사가 될수록 그의 과거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고조된다. 호황이 거듭될수록 알 수 없는 불안이 커지던 미국인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거듭된 파티 이후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하고 이들을 둘러싼 또 다른 치정 등이 얽힌 사건들이 전개된다. 이미 거부인 톰 뷰캐넌과 결혼한 데이지는 남편보다 어쩌면 더 부유한 개츠비에 끌리고, 뷰캐넌은 동네 여인과 불륜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간다. 그리고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시기에 황금 만능주의가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드러나는 과정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는 감미롭고 애절한 한국 발라드를 연상하게 하는 넘버들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기에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했던 의상이 시그니처일 것으로 짐작했던 한국 관객들에게 신선한 반전을 선사한다.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등 한국에서 수많은 뮤지컬에 참여해 이름을 알린 작곡가 제이슨 하울랜드가 감미롭고 흥겨운 재즈 리듬을 베이스로 한국 발라드를 얹어 유니크한 K뮤지컬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마이 그린 라이트’ ‘포 허’ ‘뉴 머니’ 등의 넘버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관객에게도 사랑을 받은 것은 이미 K팝을 시작으로 한국 음악이 미국·영국 등 글로벌 관객들에게 친숙한 장르가 됐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묘미를 살린 드라마틱한 넘버에 탭댄스 등의 안무가 어우러질 때는 고개와 어깨를 들썩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흥을 돋운다.
‘황금 시대’ ‘재즈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했던 1920년대 미국의 상류 사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초호화 세트와 고해상도 발광다이오드(LED) 영상은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유례 없는 경제 호황기에 더욱 짙어지는 빈부격차와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 사랑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메시지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또 엔딩에서 데이지는 “예쁜 바보로 사는 게 여자로서 최선이었다”며 회환에 젖은 듯 여성상에 대한 고민과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화려하기만 한 프로덕션은 많지만 세련미와 절제미가 조화를 이루는 프로덕션은 ‘위대한 개츠비’ 정도”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8일 오프닝 나이트를 통해 공개된 작품을 본 업계 관계자들은 “1920년대 미국의 상황이 한국인의 정서에 과연 맞을까 싶은 부분이 있었지만 기우였다”며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 성공을 향한 열망과 좌절이라는 보편적 정서가 와닿았다”고 전했다. 한 유명 뮤지컬 배우는 “얼마 전 딸을 얻었는데 데이지가 마지막 넘버를 부를 때 아버지로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고 전했다. GS아트센터에서 11월 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