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구조 개편안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석 달 내 만기가 도래하는 은행권 대출 규모가 1조 8000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기 1년 이하는 약 4조 6000억 원에 달해 석화 산업 구조조정에 속도가 붙지 않을 경우 금융권의 자금 회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19일 금융계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같은 5대 은행이 SK이노베이션·롯데케미칼·여천NCC·한화토탈에너지스·효성화학·SK어드밴스드 등 6개사에 나간 대출 중 만기 3개월 이하 규모가 이달 16일 기준 1조 8367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월 말 대비 90.3% 급증한 것이다. 만기가 1년 이내인 대출 역시 4조 5996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1월 말(2조 866억 원)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불어났다.
시장에서는 은행권이 석화 산업 대출을 줄이면서 만기를 짧게 부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만기가 짧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대출을 회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은 석화 분야 대출을 회수하고 싶어한다”며 “충분한 자구 노력과 구체적인 감산안 없이는 금융권의 협조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3개월 만기 대출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지난해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롯데케미칼(6686억 원)이다. 최근 대주주의 자금 수혈이 늦어지면서 부도 문턱까지 갔던 여천NCC에 대한 3개월 만기 채권 규모도 4100억 원에 달한다.
은행권은 이미 일부 기업에 대해서는 대출금을 줄이고 있다. 효성화학의 경우 5대 은행에 대한 대출금 잔액이 8월 기준 2309억 원으로 지난해 1월(3800억 원)보다 40% 가까이 줄었다. 주거래은행인 하나은행이 1500억 원에 달하던 대출금액을 700억 원으로 반 토막낸 영향이 컸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 심사 담당 임원은 “고객사와 오랜 관계를 맺어온 만큼 당장 재무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일방적으로 대출을 회수할 수는 없다”면서도 “일부 업체에 대해서는 신규 대출은 내주지 않고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대로 상환을 받으며 익스포저를 줄여가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석유화학 업체 중 모기업의 자금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곳에 대해서는 익스포저 관리를 특히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은행권의 대출 관리가 앞으로 더 깐깐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불황에 빠지면서 올 1분기에만 498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석유화학 업종 특성상 원료 수입에 대규모 자금이 드는 데다 중국과의 경쟁을 피하려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불황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시적으로 부진을 겪고 있는 업종이라면 모르겠지만 석유화학 업종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될 수 있어 신규 자금을 지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석유화학 기업들의 신용등급까지 내리는 추세라 은행대출 부족분을 회사채 시장에서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업평가·한국신용평가·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 3사는 최근 일제히 롯데케미칼의 신용등급을 기존 ‘AA’에서 ‘AA-’로 낮췄다. 한화토탈에너지스, SK지오센트릭의 신용등급 전망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렸다. 업계에서는 공급과잉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석유화학 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갈수록 악화할 것이라는 얘기가 새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