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등장한 바스키아 길

2025-11-06

지난달 미국 뉴욕 이스트빌리지 거리의 한 모퉁이가 붐비기 시작했다. 맨해튼 거리의 바쁜 걸음과 익숙한 소음을 잠시 뒤로하고 새롭게 명명되는 거리 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현지인들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 웨이(Jean-Michel Basquiat Way)’라는 도로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곳은 천재 화가 바스키아가 1988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 전 거주하며 작업하던 2층 스튜디오가 있는 자리다.

그 순간을 함께한 이들 가운데에는 최근 오빠의 서울 전시 개막식을 위해 첫 방한을 했던 여동생 제닌 에리보도 있었다. 당시 본지 미술 담당 기자와 인터뷰하던 중 감격의 눈물을 보였던 제닌은 제막식 현장에서 “그(바스키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의 행사가 단순한 도로 표지판 명명식을 넘어 진정한 예술가에게 건네는 인정과 위로의 자리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스키아는 이미 20대에 당시 미술계의 ‘록스타’였다. 이혼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10대 시절 집을 뛰쳐나와 뉴욕 거리를 떠돌며, ‘SAMO’라는 가명으로 거리에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문구를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3000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 등을 남기며, 당대 미국 미술의 가장 뜨거운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번 거리 명명은 바스키아를 형성한 도시의 조건들, 즉 혼돈, 문화적 충돌, 인종적 긴장, 그리고 끊임없는 재창조의 에너지를 함께 기억하는 행위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초월한다. 사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바스키아의 위상은 오히려 커졌다. 그의 작품은 기록적 금액으로 거래되었고, 특히 거대한 해골을 담은 1982년작 ‘Untitled(무제)’는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50억원)에 판매되며 미국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그의 왕관 모티프는 패션과 대중문화 전반에서 아이콘이 되었고, 거친 선, 파편화된 단어, 해부학적 드로잉, 재즈 리듬이 살아 있는 작품은 누구나 단번에 바스키아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록스타로 남아 있는 이유는 가격이나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지금도 현실의 문제들을 말하고 있고 인종과 정체성을 이론의 언어가 아닌 삶 그 자체로서 제시한다. 거리의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행위는 그를 다시 일상의 자리로 되돌려주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바스키아 웨이는 진정한 예술은 영원하다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확신을 새기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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