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과 함께하는 한국 시드볼트의 도전

2025-08-17

8월은 무더위, 그리고 여름휴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종자를 다루는 사람에게 8월은 그러한 나긋한 기억과 거리가 멀다. 2015년 8월,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국제건조지대농업연구센터(ICARDA)의 식물 유전자원이 훼손됐다. 당시 시리아 내전으로 다수의 신전과 고대유적을 비롯한 세계문화유산이 파괴되었는데, 이러한 피해가 식물 유전자원에까지 이른 것이다.

전 세계 건조·반건조 지역의 주요 작물 종자가 보존되던 ICARDA는 폭격으로 종자 보존을 위한 냉장 및 건조 시설을 잃었다.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온·습도 제어가 불가능해졌고, 치안 상황이 나빠지자 현장에 남아 있던 연구원과 기술자들은 안전을 위해 전원 철수했다. 그 결과, 수십 년간 수집·정선·보존해 온 건조지대의 벼, 밀 등 약 15만 점의 식물 유전자원이 발아력 저하, 유실 위험에 처했다.

결국, ICARDA는 종자를 복원하기 위해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에 안전중복보존해 둔 자원의 긴급 인출을 요청했다. 2015년 8월, 스발바르 지하 120미터, 영하 18도의 저장고 문이 열리고 밀·보리·완두·렌즈콩·병아리콩 등 총 38,073점의 종자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종자들은 레바논과 모로코 등 안전지역으로 옮겨져 증식, 복원돼 유전자원의 소멸 위기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설립된 후 공식 인출된 최초 사례다. 이렇게 복원된 자원들은 다시 스발바르에 기탁됐다.

식물 유전자원은 인류 생존의 근본이다. 한번 소실된 유전자원은 영원히 복원할 수 없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 100년 동안 인류가 재배하던 작물 품종의 약 75%가 사라졌다. 현재 식량 생산에 활용하는 식물은 6,000여 종에 이르나 이중 단 9개 작물이 전 세계 식량 공급량의 66% 이상을 차지한다. 시드볼트는 보관 시설을 넘어 인류 식량자원의 다양성을 지키는 인류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종자저장고 ‘농촌진흥청 글로벌 시드볼트’가 있다. 2008년 8월 14일 농촌진흥청은 유전자원 보존기술 역량을 인정받아 FAO로부터 세계 각국의 주요 유전자원을 보존하는 국제안전중복보존소로 지정됐다. 이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지정이었다.

농촌진흥청 글로벌 시드볼트 내부는 영하 18도, 상대습도 40% 이하로 유지된다. 물론 내진 설계와 비상 전력, 화재 대비 등 국제적 수준의 안전장치도 갖추고 있다.

올해 8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국의 농업 정책·전문가 그룹이 농촌진흥청의 시드볼트를 방문했다. APEC은 21개 회원국 간 경제협력을 통한 식량안보 강화를 중요한 의제로 다룬다. 회원국 중 호주, 캐나다, 미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페루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유전자원을 기탁한 경험이 있다.

방문단은 한국 시드볼트의 역할과 기술력에 크게 관심을 보였다. 특히 페루 대표단은 한국의 종자 보존기술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감자·퀴노아 등 안데스 토착 작물의 보존 협력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페루는 전 세계 감자 유전자원 중 약 3,000품종을 보유한 나라로 한국과의 협력은 양국 모두에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북극 영구동토층에 자리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현재 전 세계 식물 종자 130만점 이상을 보관하며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린다. 그러나 이상고온과 폭우로 2017년 진입 터널이 침수되는 위기를 겪은 바 있다. 한국의 시드볼트는 안정적인 지리·기후 여건과 첨단 저장 기술, 그리고 탄탄한 식물 유전자원 연구 인프라로 동아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물론 세계 종자 보존 안전망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앞으로 한국 시드볼트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그 역할을 확대하려면 장기 저장시설 규모를 단계적으로 확충하고 세계 유례없는 자동화 저장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유전자원 보존·관리·분석·복원 분야의 시드볼트 운영 국제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더불어 FAO, 국제농업연구협의그룹(CGIAR), 국제종자신탁기금(Crop Trust) 등 국제기구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로 국제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 전략도 짤 필요가 있다.

2015년 8월 시리아 사건은 “만약 스발바르가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을 남겼다. 그리고 2025년 8월, APEC 회원국의 방문과 페루 전문가의 관심은 “한국의 시드볼트 라면?”이라는 새로운 신뢰와 가능성을 열었다.

세계 종자 보존의 두 축, ‘북극의 스발바르’와 ‘동아시아의 한국’이 나란히 서는 날, 인류는 기후위기와 식량안보에 훨씬 강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희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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