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502호 법정. 항일혁명가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가 변호인과 함께 신청인 자리에 앉았다. 무려 11개월이 지나서 열리는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 사건’(이하 정판사조작사건) 재심 심리에 참석한 것이다.
정판사조작사건은 친일경찰과 검찰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재판으로 조작의 배후엔 미군정이 있었다. 고문과 가혹행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위조지폐 한 장 증거로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판결에 이르기까지 숱한 위법이 난무했다.
결과 역시 참담했다. 4개월 동안 열린 재판을 통해 1946년 11월 28일 열 명의 피의자는 모두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관술은 무기징역으로 감옥에 갇혔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후에는 불법 처형을 당했다.

이관술의 후손들은 2023년 7월 4일, 대한민국 법원에 재심을 요청했다. 해방 후 사회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했지만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조사는 완전히 미루어진 상태였다. 사실 과거사위원회는 아예 진실규명신청 자체를 하지 않길 원했다. 그리고 조사과정에 일어날 논란, 극우세력의 공격, 정판사조작사건 가해자들이 현 대한민국에서 공고하게 다져온 벽을 언급했다.
법원에 재심 신청을 한 이후 첫 심리까지 딱 1년이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검찰 측에서 제출한 반대 입장을 통지받으며 암담한 심정이 커질 때였다. 2024년 7월 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심리는 그래서 큰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재심 개시 여부를 정하기 위한 1차 심리. 합의부 주심판사는 이렇게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아만의 시대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재심을 신청한 이관술은 어떤 사람인가
이관술(1902~1950)은 울산을 본관으로 둔 가장 큰 집안인 학성이씨 농소파 중 범서읍 입암마을로 입향한 송옹의 후손이다. 울산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선바위를 끼고 태화강 상류의 물길이 흘러가는 마을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립 입신학교를 다닌 후 울산공립간이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중동학교에 입학하며 서울에 상경했고, 1925년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며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관술이 1929년 사범학교를 졸업학교 귀국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 제자들이 학생만세운동에 나서는데 그동안 존경했던 민족주의자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목격한다. 이는 큰 충격을 주었고 그가 조선반제국주의동맹에 참여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전환점이 됐다. 그러나 곧 조직이 발각된 후 구속됐고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이관술은 이후 1934년에 경성트로이카를 이끌던 이재유를 만나 조선공산당경성재건준비그룹의 지도부가 된다. 이재유를 통해 비밀결사의 운영을 배웠고 검거와 수배를 피해 함께 탈출한 후 신분을 위장하고 지하운동에 들어갔다. 1936년 12월 이재유가 경찰포위망에 체포된 후엔 전국을 돌면서 항일혁명조직을 재건에 나섰다. 그 결과가 1939년 박헌영, 김삼룡, 이순금, 권오직, 이현상, 정태식, 김태준 등이 합류한 경성콤그룹 결성이었다.
고문왕 노덕술도 굴복시키지 못한 이관술
이관술은 1940년에 함경북도 함흥과 청진으로 떠나 적색노조 결성과 항일게릴라 투쟁을 준비했다. 1941년 1월에 체포된 후에는 악질 친일 경찰 중 첫 손에 꼽히는 고문왕 노덕술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전체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로 죽지도 굴복하지 않은 불사조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관술은 그렇게 일제가 패망 직전 가장 악독한 통치를 하던 때에 일제에 끝까지 항거했다. 1940년대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항일혁명조직을 이끌었고, 해방을 맞이할 때도 대전에서 지하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이관술의 헌신은 해방 직후 크게 공인받는다.

이관술은 해방 직후 8월 24일, 조선공산당을 통합 재건한 핵심 주역이었다. 당내에서 재정부장을 맡았고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꼽혔다. 그리고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 중앙인민위원과 내각 선전부장으로 선출됐다.
1945년 12월, 잡지 <선구>에서 발표한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이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인’ 순위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다섯 번째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관술은 마치 예언을 하듯 정판사조작사건 발표 한 달 전 <현대일보>에 3회에 걸쳐 회고 글을 게재할 때 “조국엔 언제가 감옥이 있었다”라고 제목을 달았다. 그럼에도 미군정 사법부가 이관술에게 큰 수모와 모욕의 올가미를 매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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