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복의 역사’ 우영미 패션 디자이너

‘한국 남성복의 어머니’. 2022년 8월 3일자 뉴욕타임즈에 실린 우영미 패션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다. 기사 서문에는 “그녀의 옷은 영화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 영화 ‘기생충’의 최우식, 그리고 K팝 열풍을 일으킨 BTS 멤버 등 유명 스타들이 입는다. 우영미가 2002년 국제 무대에 데뷔했을 당시, 사람들은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명품 패션이 나올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적었다.
1988년 첫 번째 브랜드 ‘솔리드 옴므’를 창립한 우 디자이너는 2002년 파리에서 두 번째 브랜드 ‘우영미’를 론칭한다. ‘솔리드 옴므’의 국내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럭셔리 브랜드를 성공시키겠다는 게 목표였다.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말렸던 일을 그는 결국 해냈다.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의 명품 백화점 봉 마르셰 지하 1층 남성복 전문 매장에 들어선 ‘우영미’는 브루넬로 쿠치넬리·제냐·폴 스미스·버버리·발렌시아가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곳에서 2021년 남성복 매출 1위를 기록했다. 파리의 유명 패션 거리인 마레 지구와 생 토노레 거리에 단독 매장을 오픈했고, 영국·이탈리아·런던·일본·홍콩·중국 등에도 80여 개 매장을 갖고 있다. ‘솔리드 옴므’ ‘우영미’가 속한 회사 쏠리드는 지난 2년 연속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달 28일 서울 이태원에 4층 짜리 ‘우영미’ 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파리에서 브랜드를 시작한 지 꼭 22년 만의 금의환향이다.
전 세계 80곳 매장…2년 연속 1000억 매출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이 너무 늦었다.
“파리에서 빨리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늘 외국 매장 오픈이 우선이었다. 서울에선 신사동 ‘맨메이드 도산’ 매장에서 ‘솔리드 옴므’와 함께 있었는데, ‘우영미’ 입장에선 열네 살 많은 형님 그늘에서 살다가 비로소 독립한 거다.(웃음)”
파리에서 보낸 22년 간의 치열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진 않았나.
“다시 또 하라면 절대 못 한다.(웃음) 처음 파리에 도착해 작업실도 없이 호텔 방에서 쇼 전날 밤 꼬박 새우며 재봉틀로 옷 마무리를 했다. 겨우 섭외한 남자 모델들을 유명 브랜드들이 가로채는 일도 일쑤. 코로나19로 파리패션위크 오프라인 쇼가 모두 중지되고 디지털 영상으로 쇼를 대체했을 때도 아시아 디자이너들 중 유일하게 ‘우영미’는 파리에서 오프라인 쇼를 열었다. 마케팅 전략 팀장과 홍보·마케팅 책임자, 이렇게 달랑 여자 셋이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40개의 옷 박스를 옮겼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디지털 영상으로 대체하다니 성에 안 찼다.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코로나도 겁 안 날만큼 쇼 생각밖에는 없었으니 참 무모했다.”(웃음)
매장 안에 ‘쇼 피스(패션쇼에서 선보였던 의상들)’ 전시 공간을 따로 둔 게 새롭다.
“‘우영미’의 세계관을 제대로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 쇼 피스가 떠올랐다. 실제로 판매되는 옷은 쇼 피스의 핵심 키워드만 반영한 것이라 소비자가 완전한 무대 위 의상을 만난다면 새롭고 감각적인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실내를 스킵플로어(반 층씩 바닥을 엇갈리게 해 공간의 연속성과 개방성을 높이는) 구조로 설계했다.
“중앙 층계를 오르면서 양옆을 다 볼 수 있는 열린 구조라 층마다 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살아보니까 결국 무엇을 어떻게 ‘연결’ 하느냐가 중요하더라.”
4층과 옥상은 ‘카페 드 우영미’로 운영되고, 내년에는 지하에 스타 셰프 알랭 뒤카스의 레스토랑도 들어온다. 전층의 실내는 “간결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볼드한 걸 좋아하는” 우 디자이너답게 꾸며졌다. 두꺼운 유리 블록으로 마감된 벽은 쨍한 통창과 달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부드럽게 순화시킨다. 유럽의 고성에서나 볼 것 같은 길고 주름이 많은 붉은 커튼은 고집스러우면서도 세심하고 또 고급스럽다. 카페의 단순한 철제 프레임 소파는 ‘우영미’ 옷을 만들고 남은 원단을 씌웠는데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감각적이다. 옥상 공간은 자매인 우경미·우현미가 맡았다. 두 사람은 더 현대, 영화 ‘어쩔수가없다’ 등의 실내외 정원을 꾸민 조경업체 ‘마이 알레’를 운영하고 있는데 얼마 전 EBS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세 자매 모두 감각적인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된 데는 ‘철없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고.
“아버지 흉을 이제 그만 봐야 하는데.(웃음) 쌀이 떨어져도 저녁에 화병과 꽃을 사 갖고 오는 대책 없는 멋쟁이셨다. 식탁에 먹을 건 없는데 센터 피스는 근사한, 매일이 웃픈 나날이었다.(웃음) 아버지 옷장에는 한 달 생활비보다 비싼 외투가 가득했고, 아침이면 의식을 치르듯 로브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셨다. 미군 부대와 관련한 건축 일을 했던 아버지는 테스트로 집안을 꾸미는 걸 좋아하셨고, 집에 널브러져 있던 게 ‘엘르’ ‘마리끌레르’ ‘메종’ 같은 외국의 패션·리빙 잡지였으니 우리 자매들은 다양한 비주얼 훈련을 받은 셈이다. 빈티지 자동차도 세 대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학교 데려다 준다고 하실 때마다 정말 싫었다. 아버지는 폼 내고 싶었겠지만 오래된 고물이라 분명 학교 근처에서 멈출 테니까.(웃음)”

외국에서의 K컬처 트렌드를 실감하나.
“며칠 전 외국에서 취재 온 기자들과 함께 고사를 지냈다. ‘한국에선 새로 건물을 지으면 여기저기 숨어 계신 귀신들한테 잘 봐달라고 비는 게 전통이다’ 설명했더니 돼지머리에 돈도 꽂고 절도 하면서 신나 하더라. 요즘 K컬처를 보면 정말 대단한데, 이 파워가 갑자기 생기진 않았다. 원래 우리 민족이 춤추고 노래하고 흥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전쟁을 치르고 너무 못 살아서 눌러 놨던 것이 이제 살 만 하니까 비로소 폭발된 거다.”

올 가을·겨울 쇼 피스 중 한국 민화가 반영된 것도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금관 모형 선물을 엄청 좋아했다고 하던데, 내가 티셔츠에 신라 금관을 넣은 게 4년 전이다.(웃음) 그보다 한 해 전 경주 코오롱호텔에 묵을 때 호텔 로비의 금관 모형을 보고 ‘이렇게 하면 멋지겠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후 제주 해녀, 민화 등 한국적인 터치를 지속적으로 넣고 있다. 처음 파리에 갔던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 질문을 계속 들었던 때라 우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 파리에서 자리 잡고 천천히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니 열등감이 사라지고 가라앉아 있던 나의 정체성도 떠오르더라.”
영미·경미·현미 세 자매, 디자인 분야 종사
한국적인 모티프를 세련되게 반영할 방법이 있을까.
“옛날에는 한국적인 것을 반영하는 게 너무 억지스러웠다. 외국인들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고. 그들의 미의 기준은 우리랑 많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이 지금 K컬처에 관심을 갖는 건 다름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즉 하이브리드적인 마인드가 준비됐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보여주면 순간 현혹할 수는 있지만, 공감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음악·패션 등이 함께 덩어리로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해 오픈한 파리 생 토노레 매장은 에르메스·고야드 같은 명품 브랜드들과 나란히 있다. 한국 패션의 자부심이 느껴지더라.
“부동산 계약하면서 건물주에게 ‘우영미’ 포트폴리오를 수도 없이 보여줬다. 원하는 임대료를 내면 그만이지 건물주에게 허락을 받아야 된다?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곳에선 주변 건물주들끼리 회의도 한다. 이런 브랜드가 들어올 건데 괜찮을까 하고. 돈 있다고 아무 브랜드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더 의미 있고 상징적인 곳이라 애정이 많이 간다.”

한국인 최초로 루이비통·에르메스·디올 등 명품 하우스들이 속해 있는 프랑스패션협회 정회원이 된 ‘마담 우’는 이제 글로벌 럭셔리 영역의 아이코닉한 존재다. 누군가 ‘한국의 럭셔리 패션에는 뭐가 있나’ 물으면 자신 있게 ‘우영미’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막 시작하는 디자이너들이 도달하고 싶은 하나의 지향점이 됐다.
매장 내 귀 모양의 독특한 테이블이 인상적이다.
“이제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됐는데(웃음), 늘 오픈 마인드를 가지려고 한다. 집착하지 말고, 편견을 버리고. 그 다짐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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