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잎’을 두려워한 기형도 시인

2025-08-04

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논설위원

열대의 밤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무리 지어 검은 어둠을 수놓은 황홀한 야경, 희고 아름다운 젊음의 강변을 걷고 달리며 그악한 더위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느 구역은 검고 무뚝뚝한 미루나무들이 저승사자처럼 즐비하고 그 틈새로 악머구리, 왕매미 떼 울음소리는 아수라를 연상케 했다. 자전거길을 달리다 안양천까지 26.7㎞라 쓰인 것을 보았다. 얼마 전 다녀온 경기도 광명시의 ‘기형도문학관’이 떠올랐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안개」) 기형도(1960-1989) 시인이 그려낸 공간은 70·80년대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안양천 변 따라 포도밭을 점령 남진하던 산업화 현장이다. 공장의 검은 굴뚝, 폐수와 악취, 그리고 여직공의 죽음과 방죽에서 죽어가던 취객 사이로 흘러 다니던 안개로 환유된 세계다.

거기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운 아버지,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공장을 다니던 누나(「위험한 家系·1969」), 두 살 터울 누나의 죽음(「가을 무덤-祭亡妹歌),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던 “유년의 윗목”(「엄마 걱정」) 등 가난했던 시인의 가계와 성장기, 그리고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29년의 삶, 남겨진 시편들에 대중들의 지속적 열광이 더해졌다.

그의 시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김현)이라 평하기도 하고, “우리 세계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城)을 찾아가는 언어의 순례이자 그 성을 은폐하고 그 성을 향해 가고자 하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남진우)이라 평하기도 했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오래된 서적」),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와 같은 염세주의적 표현은 억압에 대한 응전의 의미를 갖는다고도 보았다.

기형도는 1988년 8월의 여행에서 망월동 묘지를 찾고, 거기에서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 대화한다. 그리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내가 탐닉해 온 것은 육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라고 쓴다.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을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시로 쓴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푸른 잎이 아니라, 썩은 줄도 모르고 부정한 현실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부끼는 잎, 그게 ‘검은 잎’이다. 그것은 시인이면서 언론인이기도 했던 그가 지극히 경계하고 혐오하던 ‘썩은 말’, ‘좀비 같은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비극성을 시로 풀어내고자 했던 그의 치열성이 ‘검은 잎’이라는 독특한 상징을 창조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검은 잎’은 공영방송의 정치 독립을 위한 방송 3법 처리, 낙하산 인사를 통해 편향적 보도를 일삼아온 언론 내란 세력 척결, 정치권력과 사주·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나팔수 척결, 포털의 사회적 책무 부여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식목제」) 올려 생겨난 푸른 언어의 숲을 상상해 보게 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