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바이오 산업이 의료 데이터 규제로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하는 동안 주요 해외 국가들은 빠르게 앞서가고 있다. 최근에는 신약 개발에 인공지능(AI)이 결합하면서 방대한 보건의료 데이터가 필요한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은 최대 시장인 미국을 중심으로 공격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핀란드와 호주 등은 개인별 진료·건강 정보 등을 통합된 시스템에서 관리하는 ‘보건의료 마이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트렌드에 올라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대중화된 비대면 진료 역시 만성질환·정신건강 등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관리가 쉬운 질병을 중심으로 진료 체계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은 빅테크와 빅파마가 결합해 AI 기반 신약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핵심은 의료 데이터다. 아무리 AI 기술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 경험이 풍부해도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병원·제약사 등이 당사자 간 계약을 통해 원격진료, AI 신약 개발 등에 의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 아울러 영리기업에도 데이터 개방이 가능하다.
로슈는 유전체 분석 전문 업체와 의료 데이터 플랫폼 업체를 각각 자회사로 두고 있다. 플랫폼 업체는 미국 내 280개 암센터 및 병원과 계약을 맺어 환자들의 전자의무기록(EMR)을 수집한 후 가명화해 신약 개발과 연구용으로 활용한다. 환자의 건강 상태나 의료 서비스 제공과 관련된 실사용데이터(RWD)를 확보해 면역항암제 ‘티쎈트릭’의 적응증 확대 과정에서 임상 기간을 기존 대비 수개월 단축했다. 속도가 생명인 신약 개발 경쟁에서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의 허가도 앞당기며 매출 증대 효과를 톡톡히 봤다. 유전체 분석 업체를 통해 확보한 유전체 데이터로 환자에게 맞춤형 항암제를 처방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맞춤형 항암제 처방 사업이 로슈의 항암제 매출 비중을 전체의 50% 이상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민석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바이오산업단 연구원은 “AI 신약 개발 플랫폼은 새로운 타깃 발굴, 연구개발(R&D) 주기 단축, 임상 및 시장 출시 기간 단축 등으로 효율성을 높인다”며 “주목할 점은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규제가 유연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와 호주는 헬스케어 마이데이터 시스템을 통해 의료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여 제약·바이오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핀란드는 2008년부터 ‘칸타(Kanta)’ 서비스를 통해 195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해온 의료 기록, 처방 정보, 진단 데이터 등을 정부 주도로 통합 관리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당사자 동의를 거쳐 제3자에게 제공할 수도 있다. 특히 2019년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연구·지식개발·통계·교육 등 목적으로는 이용자 동의 없이도 데이터 허가청(Findata) 승인을 얻은 뒤 2차 이용이 가능해졌다. 칸타 서비스 덕분에 핀란드의 헬스케어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핀란드의 헬스케어 산업 무역흑자는 2003년 3억 7300만 유로에서 2018년 10억 5800만 유로까지 3배가량 증가했다.
호주도 2012년부터 시작한 ‘나의 건강 기록(My Health Record)’ 서비스를 통해 의료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관리·활용하고 있다. 시스템에 등록된 데이터는 개인의 의료 기록, 처방전, 검사 결과, 예방접종 기록 등 광범위하다. 호주 국민의 97%, 약국의 99%, 공공병원의 97%가 나의 건강 기록 서비스에 등록돼 있다. 호주 국민들은 출생부터 노년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건강 정보를 저장·관리할 수 있어 연령대별 적합한 건강 관리와 의료 서비스를 지원받는다. 호주 정부에 따르면 ‘나의 건강 기록’ 서비스 덕분에 연간 최대 54억 호주달러가량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
비대면 진료 분야는 이미 단순한 만성질환 약 처방을 넘어서 체계화된 진료를 제공하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은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통해 비교적 관리가 쉬운 질환들을 중심으로 의료 서비스 시스템, 진료, 서비스 제공자들을 고려한 진료 지침을 만들었다. 그 결과 보건부 산하기관 조사에 따르면 2022년 8월 기준으로 ‘최근 4주간 비대면 진료 이용률’이 전체 응답자 118만 명의 22.5%에 이르렀으며 현재는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도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등에 대해 원격 모니터링과 비대면 상담을 결합한 프로토콜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