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보통선거 역사는 100년에 이른다. 1925년 법이 만들어졌다. 25세 이상 남성만이 대상이었지만, 당대 동양에선 첨단이었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과 대만인에게도 선거권·피선거권이 주어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는 자유민권운동의 폭발기였다.
같은 해 치안유지법도 발동됐다. ‘천황의 통치’를 뜻하는 국체(國體)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이었다. 서구 민주주의를 소화하지 못한 근대 일본의 뒤틀린 풍경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군국 일본의 탄생이었다. 폭력과 강요만 작동했다.

동시대 지식인의 삶은 어땠을까.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기억은 처절하다. 30살, 이미 도쿄제대 조교수였지만 징병을 피하진 못했다. 평양의 보병부대에 이등병으로 배치됐다.
“입대하면 사회적 지위나 가문 따위는 전혀 무관하다. 귀족 도련님이 시골 출신 상등병에게 따귀를 맞는다. 뭔가 그런 유사 민주주의적인 것이, 상당한 사회적 계급 차이에서 오는 불만의 마취제가 된 것 같다.”
외려 군대가 더 민주적일 수 있다는 반어의 세상이었다. 패망한 일본은 미국의 손에 민주주의가 강제됐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일본의 새 민주주의에 의미를 불어넣었다. 주권이 천황으로부터 국민에게 이양되는 ‘법적인 의미의 혁명’(8월 혁명설)이라고 봤다.
민주주의가 꽃피면서 좌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일본식 파시즘에 저항하다 피를 흘린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점 이들은 폭주했다. 1960년대 후반 전공투 학생들은 마루야마를 “기만에 찬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몰아붙였다. 급기야 그의 연구실까지 덮쳤다. 운동권의 폭력적 실태는 군국 일본을 닮아 있었다. 마루야마는 “파시스트보다 지독하다”고 탄식했다.
그는 평생을 파시즘과 싸웠다. 절대권력을 가지려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무비판적 지지와 복종을 경계했다.
“파시즘은 어떤 경우엔 공공연한 폭력에 의해서, 어떤 경우엔 의회 입법의 형태를 띠며, 또 어떤 경우엔 교육·선전과 같은 심리적 수단에 의거하는 등 모든 정치적 수단을 구사한다.”
마루야마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니, 한국 민주주의에 드리운 그림자에 가슴이 철렁한다. 극단화된 정치가 괴물을 만들고 있다. 대선일을 앞두고 더 섬찟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