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표정으로 황금빛 들녘을 걷는 한 남자를 카메라가 따라간다. 그 위로 내레이션이 얹힌다. “춘재의 기억은 들녘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때의 날씨와 바람은 물론 그 시절 내딛던 땅의 질퍽함과 손끝을 스치던 촉감까지. 춘재는 온몸으로 화성을 추억한다.” 여기서 ‘춘재’는 1980~1990년대 경기도 화성과 충북 청주 등지에서 15명을 살해하고 30여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이춘재를 말한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 제작진이 만든 범죄 다큐멘터리 <괴물의 시간> 1화의 도입이다. 지난 1~2일 방송된 회차의 제목은 ‘이춘재의 사계’ ‘이춘재의 낮과 밤’이었다. 범죄자를 ‘춘재’라고 지칭하며 그의 시점에서 촬영된 재연 컷을 다수 사용한 이 다큐멘터리를 본 시청자 사이에서는 ‘가해자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물론 제작진이 이춘재를 미화하려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테다. 제작진은 10일 경향신문에 “결코 범죄 행위를 낭만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밝혔다. 다큐에서 이춘재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경찰관·변호사 등의 태도 또한 ‘악질 흉악범’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청자가 미화로 느낀 지점은 다큐가 ‘이야기’처럼 느껴지도록 끼워넣은 재연 및 내레이션에 있다. 1~2화는 이춘재의 실제 진술 녹음본과 그 목소리를 AI로 재구성한 내레이션으로 그의 살인·강간 행위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때 어두운 들판에서 여성에게 몰래 접근하는 이춘재, 입이 틀어막혀 동공이 확장된 여성 피해자, 그의 손을 묶는 이춘재의 모습 등이 재연으로 제시된다. 일부 살인 사건은 수법도 자세히 묘사된다. 그러다가 이선희의 ‘J에게’(1984)를 카세트테이프로 들으며 범행 현장을 ‘추억하듯’ 거니는 이춘재의 모습이 그려진다. 범죄자의 행동을 낭만적으로 읽히게 할 불필요한 장면을 끼워넣은 것이다.
A 지상파 방송사의 한 10년차 PD는 “연출적으로 살인사건들을 계절에 비유하는 것부터 피해자 여성들을 대상화했다는 인상”이라며 “영웅 서사처럼 연출됐다는 생각에 불쾌했다”고 했다. B 지상파 방송사의 한 8년차 PD는 “초반부를 볼 때에는 드라마타이즈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관음증을 유발하는 듯한 연출이어서 보기 불편했다”고 했다.
<괴물의 시간>은 내레이션 등을 통해 ‘악인은 어떻게 악인이 되었을까’를 들여다봄으로써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범죄 행각을 낱낱이 묘사한 것에 비해 다큐는 인물이 ‘왜’ 범죄자가 되었는지 탐구하는 것에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자랄 때는 그를 억압했고, 이후에는 ‘착한 아들’이라고 감싸기 급급한’ 이춘재의 어머니에게 화살을 돌리고, “지금 이 순간 춘재의 시간은 또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우린 알 수 있을까···,”라는 통찰 없는 내레이션으로 회차를 닫았다.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제작진은 2008년~2012년 필리핀 관광객 연쇄 표적납치 살인사건과 최세용 일당을 다룬 3~4화에서는 ‘춘재는’처럼 범죄자를 이름으로 지칭하는 내레이션을 쓰지 않았다. 허나 범죄 상황을 영상미 있게 재연하려는 결은 같았다. 직접적으로 목을 조르고 폭행하는 등 피해자가 당한 피해의 묘사가 지나치게 자세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 마크를 달았지만, 지상파 프로그램은 사실상 TV를 틀면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폭력 묘사 수위다.
공익적 목적보다는 자극적인 ‘이야기’로서의 범죄를 다룬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수십년 간 범죄 탐사 보도를 이어온 <그알> 제작진이 자신들의 ‘IP’(지적재산)를 OTT 콘텐츠화 해본 시도로 읽힌다. SBS는 올해 초부터 넷플릭스와 콘텐츠 공급 계약을 맺었다. <괴물의 시간>은 넷플릭스에도 업로드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서 잘 팔리는 콘텐츠다. 30건이 넘는 살인을 저지른 테드 번디를 다룬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 등 공포·고자극 콘텐츠로서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이야기’를 자세히 연출해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전경란 동의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는 543편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를 분석한 2023년 논문에서 소위 ‘넷플릭스향’ 다큐가 TV다큐에 비해 자극적인 내용과 표현양식을 지향하며, ‘굳이’ 공익성을 구현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임종수 세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도 <괴물의 시간>을 “OTT 다큐멘터리의 문법이 레거시 미디어 다큐멘터리에 역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로 봤다. 그는 이 다큐에서는 TV 다큐로서 중요한 시의성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지금 이 사건을 ‘왜’ 다루는지 명분이 보이지 않고, 이춘재의 범행 수단이나 방법이 자백 당시에 많이 알려졌는데도 이제 와 이렇게까지 자세히 범행을 묘사하는 것은 채널 방송에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자극적인 연출이 아닌, 전달해야 할 이야기에 집중할 수는 없었을까. <괴물의 시간>에는 이춘재의 전 부인을 처음으로 인터뷰하거나, 최세용의 옥중 편지를 공개하는 등 <그알> 제작진의 여전한 취재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다. 4화 후반에는 아직 필리핀에서 시체를 찾지 못한 실종자 부모님의 사연이 소개된다. 하지만 다큐를 보고 나면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범죄자들의 비인간성을 묘사하기 바쁜 연출 장면들이 잔상에 훨씬 크게 남기 때문이다. <괴물의 시간>에서 공익적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