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곽이 드러난 미국 연방정부의 내년 예산안을 확인한 현지 과학자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우주연구기관이며, 미국 과학 지성의 본산인 미 항공우주국(NASA) 예산이 전년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삭감 폭이 24%다. NASA 기능이 훼손될 공산이 커졌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됐다. 과학에 신뢰를 보내지 않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태도 때문이다. 과거 그는 기후변화를 거짓이라고 했다. 소독제를 몸에 주입하면 코로나19가 사라지지 않겠느냐는 발언도 했다.
과학과 연구·개발(R&D)에 대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공격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2023년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과학자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런데 윤 전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사전에 낌새를 채기 어려웠다는 데 특징이 있다. 윤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6월 발간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를 보면 ‘과학기술이 선도하는 도약의 발판을 놓겠습니다’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국가 혁신을 위한 과학기술 시스템을 재설계하고 초격차 전략기술 육성으로 과학기술 분야 주요 5개국으로 도약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백서에는 이외에도 과학 발전과 관련한 수사가 가득 차 있다. ‘과학 대통령’이 될 것처럼 나섰던 윤 전 대통령에게 국민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윤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질책으로 2024년 정부 R&D 예산은 전년보다 약 10% 줄었다. R&D 예산이 이렇게 많이 줄어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과학계의 거센 저항과 국민 여론에 밀려 예산은 한 해 만에 원상 복구됐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국가 백년지대계인 과학기술의 발전 흐름이 역행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다. 각 주요 정당에서는 ‘과학기술부총리’ 도입을 검토 또는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AI)처럼 인류 문명의 흐름 자체를 바꿀 기술적 사안이 돌출하는 상황에서 과학기술부총리는 한국 R&D의 키를 잡는 선장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기술부총리를 임명한다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다. 대통령이 역정 한 번 냈다고 R&D 예산 수조원이 날아가는 상황을 제도적으로 방어하거나 조정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R&D 예산 삭감 당시 과학계에서는 윤 전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거나 고언을 하는 고위 관료를 찾기 어렵다는 탄식이 많았다. 그런 역할을 과학기술부총리가 맡아야 한다. ‘외풍’이 불어도 원칙을 지키며 R&D 예산을 시스템적으로 기획·관리할 수장으로서 부총리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역할에 부총리 명패만 덧붙이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R&D 예산이 비합리적 이유로 출렁이는 일이 재현돼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부총리의 청사진을 어느 대선 후보가 어떻게 제시하는지 유권자들이 세심히 살펴봐야 할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