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발자취는 황룡사와 분황사에 나타난다. 그녀의 업적과 백성들의 염원이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째인 634년에 건립된 천년고찰이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날 분(芬)’과 ‘임금 황(皇)’이 합쳐져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을 ‘향기 없는 모란꽃’에 비유하자 이에 대응하여 ‘향기로운 임금’의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편에 실린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條)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렇게 명했다고 한다. “황룡사 규모에 버금가도록 크고 아름답게 지으라.”(실제로는 3분의 2 정도의 규모임) 하지만 지금의 절은 규모가 매우 작다. 분황사에서 만날 수 있는 건 보광전과 모전석탑 뿐이다.
선덕여왕의 국정운영은 자신이 세운 분황사의 모전석탑에서 더욱 잘 보인다.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여성용품이 포함돼 있는데, 이는 여인이 다스린 나라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여왕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보광전의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솔거의 천수관음도 전설, 호국룡변어정의 전설을 통해서는 백성들의 이야기와 염원을 짐작할 수 있다.
여왕부터 무지렁이 백성까지 부처를 향하던 나라 신라. 경주는 불도를 닦는 도리천이자 가람의 땅이었다. 황룡사와 분황사에는 여왕으로서의 기개가 잘 나타난다. 또 천년의 빛을 찾으려 했던 선덕여왕과 그 여인을 따랐던 많은 백성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1000년 전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죽음과 정치적 반란 속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켜냈다.
부침을 거듭한 분황사의 내력
634년 분황사가 창건되자 곧바로 두 명의 고승이 차례로 찾아와 주석했다. 자장율사(590~658)와 원효대사(617~686)다. 특히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구층탑 창건을 건의하기도 했다. 분황사에는 사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 우선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755년 경덕왕 14년에 강고내말이 구리 30만6700근으로 조성했다는 약사여래상이다. 강고내말은 신라 시대의 조각 장인이다.
가람은 당간지주, 중문(中門),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품(品) 자형의 대가람이었다. 창건 당시 분황사는 인근 황룡사와 똑같은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였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발굴 조사를 통해 ‘품(品)’ 자형으로 배치된 3금당의 존재가 확인됐다. 중문은 정면 5칸의 중층이었다. 품(品)자형 1탑 3금당식 구조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양 청암리사지, 일본 아스카데라 등에서 확인됐다. 출토유물은 대형 치미, 수막새 등의 기와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청동향로, 청동거울, 금동불상 등의 금속 유물도 수습됐다.
분황사는 모진 아픔을 겪은 절이기도 하다. 1998년 보광전을 해체하던 중 발견한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 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됐다. 광해군 원년인 1609에 중창했고 1680년 5월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거북이 받친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국내에서 가장 가장 크다. 원래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라 불렀으나 보물로 승격되면서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라고 명칭이 변경됐다.
우선 용어를 정확히 하자.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건다. 당(幢)은 불화를 그린 깃발이다. 이 깃발을 꽂는 기다란 장대가 당간(幢竿)이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부른다.
부처의 땅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하겠다며 지은 동양 최대의 사찰이 황룡사다. 그 옆에 또 하나의 절이 있는데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로 향하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당간지주다. 분황사에서 강연이나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꽂던 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 제4’ ‘통도사(通度寺)’조(條)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유학 갔다 귀국하면서 당번(幢幡, 깃발)과 번개(幡蓋, 덮개)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장(590~658)은 진평왕 12년에 태어났으며 진골 귀족 가문 출신이다. 68세(무열왕 5년)에 태백산 석남원(현 정암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이게 시초가 되어 분황사에 최초로 당간지주가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눈길을 끄는 건 기둥 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다. 특이하게도 거북 모양이다. 당간지주 기둥 안쪽 면의 아래와 중간과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구멍은 지름이 15cm이고 기둥 사이에는 난간을 바쳤던 단간 받침돌이 있는데 독특하게도 거북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중에 가장 큰 데다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거북받침대가 있어 매우 이채롭다.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으나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므로 향후 국보로 재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모전석탑에 보이는 선덕여왕의 마음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분황사 탑은 벽돌을 구워 쌓은 전탑이 아니라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신라 탑의 전통은 의성 탑리 모전석탑과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으로 계승됐다가, 영양 산해리(山海里) 오층모전석탑으로 이어졌다. 탑에는 목탑, 전탑, 석탑이 있다. 전탑은 목탑보다는 오래가나 겨울에 동해를 반복하면 무너져 내리는 게 흠이다. 따라서 가장 오래 견디는 것은 역시 석탑이다.
1400년 전 여왕의 명령을 수행하듯 모전석탑은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걸작이다. 선덕여왕은 벽돌을 모방하듯 자연석을 일일이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석탑을 만들게 했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중국 유학생 출신 스님들과 백성들이었다.
모전석탑 탑신에 사용된 돌은 울산 당사동의 안산암
이 탑은 634년 분황사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가장 놀라운 건 흑회색 안산암이다. 경주 인근에는 없는 재질의 돌이다. 당연히 외부에서 가져와야 했는데 이 이야기를 해보자.
분황사 모전석탑의 탑신에 사용된 안산암은 울산 북구 당사동 일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한다. 당사동 일대에 분포하는 제3기 장기리층의 ‘당사리 안산암’이다.
박창희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석재의 산지 연구’에 의하면, 당사리 안산암은 탑재에서 발견되는 판상의 절리, 자줏빛 산화철 성분의 산화면 등과 유사한 외형 및 암석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모전석탑 탑신에 사용된 안산암을 울산 북구 당사동 일대에서 가져왔고, 그 근거는 석재의 암석학적 특징이 당사동 일대 안산암과 일치한다는 말이다.
그럼 울산 돌을 경주까지 실어 날라야 했을 텐데 이때 이 일을 맡은 건 당시 울산과 경주의 백성들이다. 석탑을 완성하기 위해 지방에서 돌을 공수해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해냈던 주인공들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모전석탑 꼭대기에는 탑신의 흑회색 안산암과는 달리 밝은 빛깔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사각형 연꽃 장식이 보인다. 탑의 기단과 감실에도 화강암을 사용했다. 탑을 지탱하는 맨 아랫부분과 풍화가 심한 맨 꼭대기 부분은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했다고 보여진다.

모전석탑은 원래 9층이었다
모전석탑을 두고 전문가들의 추측은 다양하다. 원래는 더 높은 7층 혹은 9층 규모의 거대한 석탑이었다고 주장한다. 7층이라는 설은 현재 분황사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 3층의 체감 비례를 분석했을 때 7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9층이라는 설은 1669년 경주부윤이었던 민주면(旻周冕)이 편찬한 경주읍지 <동경잡기(東京雜記)>와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 상황을 기록한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이 근거다. 두 자료에는 “9층 고탑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록은 역사다.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9층설이 대세다.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훼손돼 승려들이 다시 쌓았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면서 현재의 3층 높이 석탑으로 정리됐다. 벽돌이 온통 무너져 몇 층인지 가늠할 수 없었을 때 일본인 승려가 3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바닥돌은 자연석으로 널찍하게 쌓았고 1층은 면마다 화강암으로 문을 만들었다. 2층과 3층은 높이가 현격하게 줄었고, 지붕은 아래, 위쪽 모두 층급을 두어 계단식으로 쌓았다.

모전석탑 외부를 감시하는 4구의 사자상
모전석탑의 네 귀퉁이에는 4구의 석사자가 있다. 석사자는 천년 세월 여러 수난을 겪다가 1915년에 기단부 주변에서 발견됐는데 모두 6구였다. 그중 4구만 모전석탑에 배치하고 나머지 크기가 조금 작은 2구는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석사자상은 숫사자 2구와 암사자 2구다. 숫사자는 앞발을 꿋꿋이 뻗고 서서 목덜미 전체에 갈퀴를 세우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모전석탑의 서남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데, 대단히 무서운 표정으로 위용을 자랑하며 석탑을 지키고 있다. 암사자는 언뜻 보면 물개같이 생겼는데 북동쪽과 동남쪽 모서리에 있다. 매끄러운 몸매를 하고 동해 쪽으로 고개를 들어 바다로 쳐들어올 수 있는 외적을 막겠다는 표정이다.

모전석탑의 내부를 지키는 인왕상(금강역사상)
모전석탑의 내부를 문 앞에서 단단히 지키는 수호자들도 있다. 우람한 몸과 위협적인 몸짓으로 석탑과 불법을 수호하고 있는 인왕상인데 이들을 일컬어 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금강역사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 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 인왕상을 살펴보자. 1층 몸돌의 4면에 각각 2구씩 총 8구(4쌍)의 인왕상이 조각돼 있다. 한쪽 발에 힘을 준 채 몸을 S자형으로 비틀고 상체를 벗어 근육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1층 탑신부 4면에 설치된 감실(龕室) 좌우에 배치돼 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한쪽은 공격하려고 입을 벌리고 있고, 한쪽은 방어하려고 입을 다물고 있다. 금강역사 한 명의 힘은 코끼리 100만 마리의 힘과 맞먹는다고 한다. 이들이 가진 무기 금강저(金剛杵)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다.
여기서 잠시 금강저에 대해 알아보자. ‘금강저(金剛杵)’는 힌두교 신화에 나온다. 직역하면 ‘금강으로 만든 절구공이처럼 생긴 무기’다. 산스크리트어 ‘바스라’를 음역한 말이다.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한 수행자 중 한 명이 ‘다디치 현자’였다. 다디치는 자비심을 발휘하여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런데 그의 척추뼈가 너무나 단단했다. 그래서 강력한 무기가 됐고 이걸 가지고 악마들을 무찔렀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에 따르면 불교에서 이것을 수용해 금강석(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는 견고함에 비유한다. 또 중생의 모든 번뇌를 금강저가 벼락처럼 내리쳐서 부수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사리 없는 사리장엄구
모전석탑 감실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사리는 없고 여인의 생활용품이 다수다. 석함에는 녹색 유리 조각, 구슬, 가위, 금·은 바늘과 은함, 중국 송나라의 숭녕통보(崇寧通寶)와 북제의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등 다양한 유물이 함께 담겨 있었다. 또한 타이완이나 오키나와 등지에 서식하는 조개껍질도 포함돼 있어 당시 신라의 대외 교역을 짐작할 수 있다.
1915년 일제강점기 때 해체 수리 과정에서 흥미로운 게 발견됐다. 당시 기단부 4면의 문 안쪽 감실과 2층으로 올라가는 탑신부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석함 하나를 찾아냈다. 여기에서 선덕여왕의 지혜가 담긴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명으로 봉인한 사리장엄구는 여느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리장엄구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경 그리고 시주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물건을 넣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모전석탑의 사리장엄구에는 독특한 소품들이 눈에 띈다. 가장 도드라진 것이 바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소품들을 넣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바느질할 때 쓰는 쇠가위,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과 바늘통, 실패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여성들의 생활용품이다.
지금도 탑을 만들면 가장 핫한 물건들을 넣는다. 따라서 분황사 사리함에 든 물건은 당시를 대표하는 물건으로 봐야 한다. 바늘이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 물건의 주인공이 당대 최고의 신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 불씨를 만드는 돋보기가 있는데 ‘수정화주(水晶火珠)’다. 유리가 아니라 수정으로 만들어진 볼록렌즈다. 화주는 금은보화보다 물리적 값어치는 낮을지언정 여인의 지혜를 상징하는 생활필수품임에 틀림없다. 모두 작지만 대단히 의미 있는 사리장엄구들이다. 그 외 금과 은으로 된 유물들과 각종 보석류같이 부귀를 상징하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사리장엄구들을 모전석탑 안에 넣은 선덕여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전석탑을 세울 때의 염원과 같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전석탑에는 외적을 막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선덕여왕의 염원이 켜켜이 쌓여 있다. 마찬가지로 사리장엄구 역시 비록 여인이 다스리는 나라지만 강하고 안정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간절함이 묻어난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초의 반란이 이때 일어났다. 바로 647년 1월 ‘비담의 난’이다. 비담은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고 하는 명분을 내걸었다. 선덕여왕은 즉각 김유신에게 진압을 명했다. 물론 당시 선덕여왕의 노환과 후계자 문제도 반란의 배경이 됐다.
김유신은 월성에 왕실 군대를 주둔시키며 열흘 정도 공방전 끝에 결국 반란을 진압하지만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정계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다.
글: 김상범 울산지역사답사회 부회장
사진: 변상복 울산지역사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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