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정부는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대폭 증액한 35조3000억원으로 편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예산은 오롯이 과학기술계 몫인데, 대폭 증액한 근거는 인공지능, 양자 컴퓨팅 등 미래 먹거리 방면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나라와 국민의 미래 먹거리를 챙김은 국가가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책무이기에 R&D 예산 증액은 무척 반길 일이다. 그런데 국가는 미래 먹거리만 챙기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먹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살거리’ 또한 국가가 응당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인문사회계의 R&D 예산이 대폭은 고사하고 다소라도 늘어난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 핵심 의무를 저버린 행태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맹자는 백성에게 항상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줌으로써 먹는 문제를 해결해줘야 비로소 백성이 예의를 닦게 된다고 했다. 관중이라는 명재상은 “창고가 곡식으로 가득 차야 예의를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따지게 된다”고 했다. 맹자와 관중은 정치적·사상적 지향이 정반대인 유가와 법가에 각각 속하는 인물이지만, 정치의 기본을 먹는 문제의 해결에 두었다는 점에서는 이처럼 공통적이다.
먹는 문제의 해결을 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보지 않았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정치적 지향은 정반대였지만 둘 다 먹는 문제의 해결을 도덕 실현을 위한 전제로 제시했다. 곧 그들에게 먹거리 확보는 국가가 마땅히 도모해야 하는 윤리적 실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을 뿐,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지당한 이치를 맹자와 관중은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국가는 미래 먹거리만 확보하면 정당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미래 ‘살거리’도 확보해야 비로소 정당화되는 존재이다. 먹거리 확보는 국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전제일 뿐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처참한 수준의 인문사회계 R&D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 인문사회 학술의 본령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살거리’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먹고사니즘이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살 수 있다는 저급한 인식의 소산이어서는 부끄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