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9년 뉴욕타임즈는 '베이클랜드'가 개발한 합성플라스틱을 소개하며 이렇게 보도한다.
“천연재료의 종말,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이끄는 힘”
플라스틱의 어원은 그리스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다. 모양을 바꿔 생각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플라스틱은 자연으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인류에게 안겨줬고, 1950년대 플라스틱 혁명을 거치며 다른 어떤 소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는 플라스틱에 익숙하지 않다. 자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화하기가 어렵다. 결국 어딘가에 남아 자연과 인류를 위협하는 플라스틱의 역습이 현실이 되고 있다.
◇올해 '세계 환경의 날' 주제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 기념식이 '플라스틱 오염 종식(Beat Plastic Pollution)'을 주제로 제주에서 열린다. 비록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지난 해 11월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제5차 유엔 플라스틱 오염 방지조약 협상(INC-5)에 이어 플라스틱에 대한 국제적 행사가 국내에서 열리게 되는 것이다.
기존 전통적 경제모델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이어지는 선형경제(Linear Economy)라면, 자원의 재사용, 재활용하는 경제 모델은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로 표현된다. 2000년대 이후 유럽연합(EU)을 필두로 한 선진국들은 이러한 전환을 본격 추진해 왔다. 일명 '제6의 물결'이라고 불리는 인류 경제사의 전환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매우 다른 경제성장의 길을 걸어왔지만, 재활용과 순환경제 사회로의 전환을 남다르게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중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는 이미 선진국을 뛰어넘는 성과로 순환경제사회 전환의 핵심 정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가 놀라워하는 'K-EPR(Extended Producer's Responsibility)'
EPR는 생산자에게 제품 사용 후 발생하는 폐기물의 회수와 재활용 의무를 부여하는 제도다. EPR로 생산자는 소재의 사용부터 제품의 출하까지 모든 과정에서 재활용을 고려하게 되므로 매립·소각 등 단순 폐기되는 폐기물이 줄어든다. 1990년대 제도를 시작한 EU에서 수입해와서 우리나라는 2003년에 제도를 시작했으나, 그 성과는 훨씬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으면서 K-EPR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플라스틱 포장재 재활용률은 96%로 독일(51%), 프랑스(25%) 등 EU 주요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EPR 대상품목은 플라스틱 제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기·전자제품에도 EPR이 적용된다. 전기·전자제품은 철, 구리, 알루미늄 등 고품질 자원을 포함하고 있어 재활용의 가치가 높다. 지금은 50종의 제품이 대상이지만, 내년부터는 모든 제품에 적용된다. 이는 2018년 EU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시행되는 것으로 운영 성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 EPR을 벤치마킹하는 국가도 늘어나고 있다. EPR은 순환경제를 위한 하나의 제도지만, 제도 운영을 위해서는 재활용 기술과 회수·처리시설 등 인프라 구축이 함께 필요하다. 한국환경공단은 EPR을 해외에 진출시켜 국내 기업이 해외시장에 동반 진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재생원료 사용은 국경을 넘을 경제여권
순환경제 사회 전환을 위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재생원료'이다. 폐기물이 원료로 경제사이클에 다시 투입되게 하는 순환경제 생태계 구축은 순환경제의 핵심이다.
EU의 재생플라스틱 30% 사용, 바이오 항공유 2% 이상 급유 의무화 및 미국·캐나다의 재생원료 사용 의무화 등 재생원료 사용 규제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에게 재생원료 사용이 더 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닌 이유다.
우리 정부와 공단도 재생원료 사용 기준을 EU 수준으로 높이고,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한국형 재생원료 사용 관리체계를 구축했다.
상대적으로 영세한 기업이 파편화돼 흩어져 있는 국내 재활용 산업의 연결과 지원을 위한 플랫폼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공단이 포항에 구축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자원순환 클러스터'가 그 예다. 배터리 뿐만 아니라 고품질 핵심 자원을 회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민관이 협력하는 플랫폼이 많아져야 한다.
◇폐기물 발생의 근원적 저감을 위한 노력 필요
지금까지 우리는 '생산-소비-폐기-재활용'으로 이어지는 플라스틱의 수명주기 중 마지막 단계, 즉 재활용에 집중해 왔다. 일회용품 줄이기와 같은 정책도 마찬가지다. 재활용 기술과 제도가 발전하면서 재활용 비율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최고 수준의 플라스틱 발생량을 줄이는 노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적 구조를 감안하면 플라스틱의 생산을 규제하는 협약에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발생량을 줄여나가는 방식의 정책수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국제적 압박 속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마지막으로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일회용기 보다는 다회용기를 사용하는 일, 제품만 보지 않고 친환경 포장 여부를 확인하는 시민의식의 전환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임상준 한국환경공단 이사장
〈필자〉임상준 한국환경공단 이사장은 1994년 제37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국무조정실 기획총괄정책관, 대통령실 국정과제비서관, 제20대 환경부 차관 등을 역임했다. 국정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환경 현안의 접근에 있어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해법을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메디슨대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