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출세 마다하고 韓서 종자 개발 전념
약자에 대한 보편적 배려 뜻 아니었을까
근현대 한국의 위대한 과학자들을 손꼽으라고 하면 ‘씨 없는 수박’을 최초 개발했다고 잘못 알려진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석탄화학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이승기, ‘나비 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수상 후보에 오른 이태규를 든다. 이 가운데 필자에게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누린 과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우장춘을 들겠다.
우장춘은 1898년 4월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우범선은 중인 출신의 무인으로 명성왕후 시해 사건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관여했다가 이 사건이 폭로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우장춘이 만 5세이던 1903년 11월 동병상련을 나눴던 망명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고영근은 전봉준에게 탐관오리로 지목될 정도로 악명이 높았지만 어느 순간에 변신하여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아 반정부운동을 펼쳤던 기회주의자였다. 그리고 고종의 품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우범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한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우장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졸지에 고아원에 들어갔고 이후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혼혈아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비록 아버지 지인과 조선총독부의 수상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의 차별과 냉대를 이겨내야 했기 때문이다. 직장 시절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팔꽃, 페튜니아, 유채 등 현존하는 종을 재료로 삼아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내 이른바 ‘종의 합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음에도 승진과 대우 면에서 민족 차별이 여전하였다.

따라서 우장춘이 1950년 3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복잡했다. 한쪽에서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과학자이자 혁명가의 아들로 비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명성왕후를 시해한 역적의 아들로 다가왔다. 그러나 우장춘은 이런 이중적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았을 때 아버지가 남겨 놓은 조선인 호적을 활용하여 자발적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서 묵묵히 종자 개발에 힘썼다. 이때 그는 정부로부터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번번이 고사하면서 배추와 무 종자의 육성, 무병(無病) 감자 개발에 힘을 쏟았다. 훗날 밀감 개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그는 소장실과 연구실에서 근무하기보다는 일종의 실험실이라 할 농장에서 고무신을 신고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무신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꿈꾸었던 입신출세를 마다하고 이처럼 정치권과 거리를 두었다. 또 그의 일본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책정되었던 한국 정부의 기금을 실험장비 구매로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있다. 일본에서 그의 지위가 탄탄해지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왜 한국에 들어왔을까? 아버지의 죄과에 대한 속죄였을까? 생전에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좀처럼 밝히지 않아 그의 속내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필자가 감히 짐작하건대 약자에 대한 보편적 배려는 아니었을까? 무와 배추, 고추 종자가 보잘것없어 발을 동동거리는 농민과 한국인 보통사람의 삶이 그의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의 이런 헌신은 1959년 8월 7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되면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 10일 경계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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