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후에 확인된 팩트와여러 등장인물 및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 20화. 대동권번 기생도 위안부로 끌려갔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자기 손으로 제 무덤을 파고 그 자리에 묻힌다고 할 수 있겠다.
죽은 다음 무덤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보고 무슨 비석이 세워지느냐는 것도 묻힌 사람의 생전 행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사후 무덤 관리까지 제 손으로 하는 셈이다.
일본 사람들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장이 점점 넓어짐에 따라 지원병·학도지원병·징용 등으로 남자들은 전쟁터로 모두 끌려나갔고, 고무·설탕·쇠고기·쌀 등 생활필수품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판국에 명월관 등 장안의 요릿집이 그전처럼 흥청거릴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문은 열었으나 찾는 이 없고, 손님이 설사 온다 해도 차려낼 음식이 없었다.
이 무렵 네 곳에 있던 권번을 하나로 묶으라는 지시가 내려 대동권번이 생기고 지금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얼마 안 돼 기생이라는 이름이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접대부라고 이름마저 바뀌었다.
기생들은 어느덧 화려했던 비단옷 대신 몸뻬라는 일본식 롱바지를 걸치게 되었고, 점심 때쯤엔 명월관에서 점심을 나르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밤 1시나 2시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거문고를 비껴 들고 인력거 위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던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기생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피에 굶주린 왜놈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