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피셜
잘 만들어진 브랜드는 특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흔히 브랜드 정체성, 페르소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이런 브랜드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매혹적인 세계를 만들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서점에 가면 익숙한 책들의 낯선 모습을 종종 발견합니다. 출간 10주년, 100쇄 기념, 작가 특별전 같은 명분으로 표지 디자인을 바꾼 리커버(re-cover), 일명 ‘표지갈이’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죠.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리커버 도서를 전면에 내세운 주요 출판사 부스들이 여럿 등장했고, 온라인 서점도 자체 프로젝트를 통해 단독 리커버 도서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리커버 붐은 치열한 출판계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수백 권의 신간이 쏟아지는 가운데, 책 표지는 독자의 눈길을 끄는 첫인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책은 단순한 상품이라 하기엔 까다로운 대상이죠. 다양한 주제와 깊이가 담겨 있고, 표지는 몇백 페이지 이야기의 감성과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하니까요.
비크닉은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좀 특별한 인물과 마주했어요.『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물 만난 물고기』『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등 20년 가까이 400여 권을 작업한 정지현(42) 스튜디오 즐거운생활 북디자이너입니다. 업력도 업력이지만 정씨가 남다른 건, 지난달 『책의 계절』이라는 책을 내며 직접 표지까지 맡았기 때문이죠. 책의 시작과 끝, 겉과 속을 모두 경험해 본 그에게 서점가의 요즘 이슈들을 알아봤어요.
저자가 된 북디자이너…전 세계 책의 공간을 소개하다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다 책을 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출판사 ‘김영사’에서 북디자이너로 일하던 2013년부터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점이나 도서관, 또 책 관련 거리와 축제를 기록으로 남겼어요. 그러다 지난해에야 제 여행을 관통하는 주제가 ‘책 여행’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 저만 알기엔 아깝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의 공간’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을 쓰게 됐어요. 책 디자인도 당연히 직접 했고요.
저자가 되어보니 디자이너로 일할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나요.
보통 마감을 지키는 작가가 많지 않아요. 그러면 디자인 작업이 덩달아 늦어져 마음이 촉박해지곤 했죠. 그런데 책을 써보니 글이라는 게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써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원래는 지난해 가을쯤 출판 목표를 잡았는데, 거의 1년 가까이 늦어졌어요. 작가의 고충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쪽까지 디자인한다…논리 없는 디자인은 실패한 것
지금까지 400여 권을 작업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2011년에 나온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요. 무라카미 하루키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대담집인데, 음악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대놓고 드러내는 대신 음악의 ‘느낌’을 표현하려 했어요. 제목 글자를 해체해 음표처럼 보이게 했고, 음률이 느껴지도록 배치했죠. 다음 장엔 빨간 속지를 넣어 피아노 건반 덮개를 연상시켰고요. 저는 가급적 정해진 디자인 규칙을 조금이라도 깨보려 노력하는 편인데, 이 책 역시 그런 시도를 많이 한 작업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표지에서 책 디자인이 끝나는 게 아니네요.
책은 여러 장으로 묶여 있잖아요. 디자인을 통해 책을 펼치고 덮는 순간까지 긴 호흡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글이 너무 많거나 복잡한 개념이 등장할 때는 비어 있는 면을 배치해 독자가 숨을 고를 수 있게 하고, 장면 전환이 필요할 땐 색깔이 있는 면을 과감하게 넣죠. 글자 크기나 스타일을 조절해서 이야기의 강약을 전달하기도 하고요. 종이 종류·두께·색감까지 모든 디자인에 의도가 있다고 보면 돼요.
디자인에도 저자와 편집자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지 않나요.
디자인 시작 전, 저자와 편집자에게 아주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요. 그다음엔 원고를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키워드를 뽑고, 그걸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디자인 방향을 잡아요. 디자인이 감각적인 작업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논리적인 영역이에요. 선 하나, 색 하나, 이미지 위치까지 왜 그 자리에 특정 형태로 있어야 하는지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설명할 수 없는 디자인은 설득도 할 수 없고, 결국 실패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북 디자인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든 경험도 있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10만 부 넘게 팔렸고, 『물 만난 물고기』『간송 전형필』 등의 책은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어요. 물론 작가의 이름과 책 내용이 중요하지만, 디자인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 없어요.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보면 책을 선택한 이유로 디자인을 많이 언급하거든요.

미적 감각 높은 한국인…리커버는 생존 수단
최근 책 출판에 디자인이 점점 중요해지는데요.
중요한 요소가 된 지 꽤 됐어요. 서점에만 가도 형형색색의 예쁘고 독특한 책들이 열심히 존재감을 뽐내잖아요. 외국인들도 한국 서점에 가면 마침 백화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요. 한국 독자들의 미적 감각이 높기 때문일 거예요.
리커버 도서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건가요. 일각에서는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있는데요.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현실을 고민하며 나온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또 매년 수많은 책이 쏟아지다 보니 조명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좋은 책도 많아요. 그런 책들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보고 싶다는 출판계의 의도가 담긴 시도이기도 하고요. 내용은 그대로인데 디자인만 바꾸는 일이 꼭 책에만 있는 건 아니에요. 많은 소비재가 리패키지되면 다시 주목받기도 하잖아요. 책도 마찬가지죠. 출판 시장도 자본주의 안에 있는 산업군이고, 수익이 나야 지속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너무 가혹한 시선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북 디자인도 시대별 유행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북 디자인을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엔 캘리그라피가 굉장히 유행했어요. 당시 웬만한 책 제목은 다 붓글씨로 썼을 정도죠. 2010년대 들어서며 일러스트·캘리그라피·타이포그래피 등 다양한 디자인 기법이 혼합되면서 북 디자인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유행을 따르지 않는 흐름이 강한 것 같아요. 잘 팔리는 디자인 공식이나 문법보다 책의 콘텐트에 집중한 결과물이 많아지고 있거든요. 젊은 디자이너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자책 시장이 커지고 있는데, 표지 디자인에도 변화가 있나요.
전자책에서 북 디자인을 구현하기엔 한계가 있어요. 북 리더기에서 제공하는 서체와 배경·여백 형태에 맞추면 원래 디자인이 사라지니까요. 물론 PDF 형태로 디자인을 살리는 방식도 있죠. 이번에 낸 『책의 계절』도 PDF 형태로 전자책을 낼 예정이에요. 독자들이 제가 의도한 디자인대로 읽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미래엔 북 디자이너의 디자인까지 담아낼 수 있는 제3의 북 리더기가 나오면 좋겠어요.
전자책부터 숏폼까지…요즘 출판 시장이 살아남는 법
책을 안 읽는 시대인데, 도서전 같은 행사는 점점 더 인기를 끄는 것 같아요.
도서전마저 흥행에 실패했으면 암울했을 것 같아요. 독서 인구가 줄고 있다곤 하지만 독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도서전은 숨어있는 독자와 작가, 출판사를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책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도서전 같은 공간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도서전에 가면 책만큼이나 굿즈도 많이 보여요.
2010년대에 알라딘에서 시작한 굿즈샵이 큰 반향을 일으켰죠. 지금은 아예 하나의 시장이 형성됐고 ‘텍스트힙’이라는 트렌드로 북 커버 같은 아이템도 인기를 끌고 있죠. 책 굿즈를 소비하는 건 러닝이나 등산을 하기 전 장비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본질을 더 잘 즐기기 위한 부가적인 즐거움인 거죠.

출판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앞으론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까요.
전자책이 등장하고, 숏폼 등 자극적인 콘텐트가 늘면서 책의 경쟁자가 많아졌죠. 하지만 동시에 책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다시 돌아보는 흐름도 보여요. 최근 유튜브 채널 ‘ODG’가 교보문고와 협업해서 책을 주제로 한 콘텐트를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는지, 책 읽는 이유는 무엇인지 들어보는 콘텐트죠. 그동안 책은 혼자 읽는 매체라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