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천안=동양뉴스] 느티나무 가지가 서로 다른 하늘을 향해 자라는 모습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 그루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자라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理致)이다. 어느 가지는 햇살을 더 많이 받고, 어느 가지는 그늘에서 묵묵히 자란다. 이처럼 방향이 다를 수 있고 방식이 다를 수 있다. 우리의 삶 또한 세월이 흐르고 직장과 결혼 등을 통해 곁가지처럼 우리는 점점 ‘같은 집의 사람’이 아닌 ‘각자의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어릴 적 같은 방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웃고 싸우고 울던 사이였지만. 세월이 흘러 부모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선(線)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선은 재산(財産)이라는 이름으로, 누가 더 부모를 많이 모셨는가라는 감정(感情)의 저울로, 때로는 섭섭함이란 오래된 앙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이가 가장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부모의 연로함이 마음을 짓누를 때면 덮어 두었던 감정들은 오해(誤解)와 다툼으로 하나둘씩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과거를 이해하며 서로 간에 다툼의 일보다 함께 나아갈 가족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쉽지가 않다. 필자(筆者) 또한 매번 다짐하곤 한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부모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자고. 재산은 나누되 마음은 모으자고. 물질은 나눌수록 평등해지고, 마음은 모을수록 따뜻해진다고. 하지만 사람사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말은 날이 서있고 상처는 깊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을 다친 형제에게 다시 손을 내민다는 건 과거를 덮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며, 상처를 인정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떠한 지혜(智慧)를 갖다 붙여도 다친 마음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설령 말을 아끼고 마음을 열며 부모님의 뜻에 그 중심을 맞추어 놓아도 부모의 심경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었을까. 이러한 갈등(葛藤)의 뿌리는 대부분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누가 더 부모에게 인정을 받았는가, 누가 더 희생했고, 누가 더 억울한가. 이 모든 계산은 결국 부모의 사랑이라는 잔고(殘高)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계산(計算)을 넘어서는 법이다. 사랑은 '누가 더 많이 주었는가' 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가족(家族)도 그 뿌리가 같기에 비록 방향이 달라도 근본은 하나인 것처럼 언제든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삶이 조금씩 느려지던 날 혼자 앉아 앨범을 넘기다 보면 문득 형제의 웃음소리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고무신 벗어던지고 논두렁과 개울가에서 뛰놀던 기억들, 메뚜기 잡고 미꾸라지 손으로 잡던 손맛이 그리워진다. 뙤약볕에 벌겋게 익은 얼굴에 옷이 젖어도 해 질 녁까지 놀던 기억. 몰래 서리한 설익은 수박 쪼개먹던 맛.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가 정겹게 풀어냈던 사투리 속 귀신 이야기에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던 한여름밤의 추억. 어디 이뿐이랴 손등으로 땀 닦으며 밥상 차리던 어머니의 갓 지어낸 고봉밥과 보글보글 된장찌개, 장독대에서 꺼낸 김치 앞에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하며 나누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는 따뜻한 정이 숨어 있었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처의 이유(理由)보다, 다시 손을 잡을 ‘한 번의 용기(勇氣)’일지도 모른다. 침묵(沈默)은 때론 싸움보다 나은 해답(解答)이 될 수 있다지만 결국 한 뿌리로부터 자라난 운명을 지녔듯이.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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