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 타결의 의미와 과제

7월 30일,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협상’ 마감시한(8월 1일)을 이틀 앞두고 한·미 무역협상이 전격 타결됐다. 결과는 예고됐던 25% 관세 대신 15%. 대신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1000억 달러의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다. 자동차 품목 관세는 일본·유럽연합(EU)과 동일한 15%로 맞춰졌고, 반도체·의약품 분야에서는 최혜국(MFN) 대우를 확보했다. 그러나 철강·알루미늄에는 여전히 50% 고율 관세가 유지돼 업계 부담은 지속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무관세’ 원칙이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비판도 있지만, 미국 시장에서 경쟁국과의 형평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는 ‘최악은 피했다’는 평가가 많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측은 자동차 관세를 15%가 아닌 12.5%로 낮춰달라며 기존 2.5% 무관세 조항 준용을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향후 세부 조율 과정에서 한·미 FTA를 발판으로 국익을 지킬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협상 조건의 표준화’ 노린 미국
협상 효율성 높이고 메시지 강화
미국 평균관세율 18.6% 최고치
‘트럼프 라운드’ 계속될 가능성
한·미 FTA, 공급망 등 보완해야
AI 등 신통상 이슈 협력 확대를

‘양자’ 같지만 실상은 ‘일 대 다’
이번 협상은 표면적으로는 한·미 양자협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 대 다(一對多)’ 구도였다. 서로 조건과 양보 요구를 제시한 한·미간 협상장은 다른 주요 교역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개된 일종의 다자 무대였다. 일본·EU·캐나다 등 다른 국가와의 협상에도 이 조건들이 ‘전이(spillover)’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나라에 적용된 조건이 한국에 반영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물론 이런 구도는 우리만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을 진행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현장에서는 양자 협상처럼 미국과 마주 앉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다수의 이해관계자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있었던 셈이다.
이 구도에서 미국은 전략적으로 ‘조건의 표준화’를 노렸다. 특정 국가와의 협상에서 도출된 조건을 다른 협상에도 복제함으로써 협상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적 메시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15% 단일 상호관세율 채택은 그런 맥락에서 ‘글로벌 표준 관세율’처럼 기능할 수 있다.
이번 협상을 게임판에 비유하면 이렇게 된다.
첫 수=미국이 고율 관세나 시장 접근 제한을 ‘위협 카드’로 꺼낸다.
둘째 수=한국은 완화 조건을 제시하되, 다른 나라의 합의 조건을 의식해 수위를 조절한다.
셋째 수=미국은 이를 다른 국가와의 협상과 비교하며 추가 베팅을 하거나 다른 국가와의 협상에 재활용하며 추가 이득을 노린다.
바둑 사석작전처럼 물러설 필요도
중요한 것은 단판의 승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한적 양보가 장기적 이익을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다. 바둑의 사석(捨石)작전처럼 때로는 작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더 큰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물러설 필요가 있다. 이번 합의 역시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향후 공급망 협력·투자 승인·기술 표준 논의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확보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일본은 자동차·반도체·에너지 중심의 투자 약속을 조건으로 15% 관세를 적용받기로 했다. 일본 언론은 이를 “위기를 기회로 바꾼 협상”이라고 평가했지만, 실제 이행 가능성과 의회 동의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EU는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7500억 달러 상당의 에너지 구매 약속을 내걸었으나, 회원국 간 이해관계 조율 문제로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일부 국가는 자국 산업 보호와 통상 자율성을 이유로 미국식 압력 외교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한국은 일본·EU와 유사한 조건을 확보했으나, 협상 시한이 임박한 상황에서 전략적 카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로이터통신은 “한국은 빠르게 협상에 임해 파국은 피했지만 구조적 개선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조선·배터리·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의 공급망 연계를 강화하고 대미 진출 기반을 확대한 점은 의미가 있다.

투자조건 등 후속협상이 더 중요
이번에 협상이 끝났다고 진짜 게임이 끝난 건 아니다. 대미 투자 세부 조건 등 핵심 쟁점은 향후 협상으로 남아 있다. 합의가 공식 문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에서 차이를 낳을 수도 있다. 앞으로 진행될 후속 협상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다. 이를 위해 먼저 합의 내용에 대한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 발효 시점과 예외 조항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른 나라의 합의 내용과 비교해 불이익을 차단해야 한다. 또한 산업별 영향 분석이 필요하다. 업종별 손익 가능성을 따져 맞춤형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외교·경제와의 연계 전략도 필요하다. 관세 문제를 산업·기술·에너지 협력 파트너십과 연계해 종합적인 대미 협상력을 확보해야 한다.
예일대 예산랩 분석에 따르면, 2025년 8월 미국 평균 관세율은 18.6%로 치솟았다. 1933년 이후 최고치다. 1943년 이후 평균 관세율이 10%를 넘은 적이 없었고, 1947년 이후 관세 적용대상 수입이 18%를 넘은 사례는 없었다. 전후 미국은 관세 인하를 통한 무역 확대를 주도하며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에는 ‘무역 개방의 교과서’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이 흐름을 완전히 뒤집었다. 단순한 경기 대응이 아니라 기술 패권 경쟁과 안보동맹,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전략적 맥락에서 관세가 활용된 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 제이미슨 그리어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현재의 WTO 기반 통상 질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평가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전략이 ‘트럼프 라운드’라는 새로운 질서의 출발임을 선언했다.
관세정책은 선거와 직결된다. 민주·공화 양당 모두 ‘경제안보’를 앞세워 제조업 부활과 고용 보호를 내세우는 상황인 만큼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와 고율 관세 기조가 쉽게 꺾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직면한 세 가지 압박
한국은 이번 협상 이후에도 세 가지 압박에 직면해 있다. 합의 또는 이행 실패 시 관세 재부과 위험, 미국 내 생산기지 확충 요구. 미·중 디커플링에 따른 핵심광물 규제 강화 등 공급망 압박이다. 그러나 이들 압박을 기회로 전환한다면, 안정적 시장 확보와 중국산 대체 수요 창출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희토류, 배터리 핵심 소재, 식량 자원 등 전략 품목에 대한 국제 공동대응 매뉴얼 마련과 긴급 대응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동시에 미·중에 대한 우리 수출의 과도한 의존도를 감축하기 위한 다변화가 필수적이다.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통해 전략적 통상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EU·인도 등과의 경제안보 파트너십도 병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일부에서는 한·미 FTA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FTA 협정국임에도 한국은 일방적인 고율 관세 위협에 노출됐고, FTA를 통한 분쟁 해결이나 관세 우대 조항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행 FTA가 공급망·데이터·기술 규범 등 새로운 쟁점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미 FTA가 완전히 무력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디지털 무역, 데이터 이동, 인공지능(AI) 및 기술 표준 등 신통상 이슈를 포함한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 한·미 FTA 내 분쟁해결 메커니즘 복원, 비관세장벽 사전 조정메커니즘 강화, 산업별 민관 공동 대응체계 구축, 공동위원회를 활용한 대미 소통 채널 확대 등 미국과의 양자 협력을 제도화함으로써 미래의 유사 상황에서 협상력을 제고할 수 있다.

통상 패러다임 전환, 한국의 길
글로벌 통상 질서는 무차별적 시장개방에서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선택적 세계화’로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기후, 안보, 첨단기술이 통상과 얽히며, 과거의 통상정책과는 전혀 다른 통상 프레임이 요구된다. 한·미 FTA를 전략 플랫폼으로 활용해 외교·산업·기술·통상을 아우르는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민관 협력을 통해 글로벌 규제, 기술 표준, ESG 요구에 대응하는 유연한 통상정책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은 단기적으로는 위기를 봉합한 ‘선방’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글로벌 통상질서가 규범 기반에서 힘의 논리로 전환되고 있다는 구조적 경고다. 이는 단순한 관세 조정보다 훨씬 깊은, 무역의 지정학적 구조 전환을 반영한다.
한국은 이제 단순히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규칙을 설계하고 주도하는 전략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무엇보다 FTA를 재정비하고, 산업과 안보를 통합하며, 글로벌 공급망에서 신뢰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통합적 대응이 시급하다. 무역이 산업정책이며 통상이 외교전략이 된 시대에, 한국은 설계자로서의 책임과 능력을 동시에 요구받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 해법이 아니라 중장기 전략이다. 이번 관세 협상의 끝은 곧 새로운 경제안보와 통상정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