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임영웅 연출 되살린 ‘고도를 기다리며’…“우리는 선생님께 꽁꽁 묶여 있어”

2025-09-09

'임영웅 선생님이 하늘에서 이 작품을 보고 계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호랑이처럼 혼을 내셨을까, 아니면 흐뭇하게 보실까' 하게 됩니다. 우리 배우들은 이 작품을 임 선생님에게 바치는 기분으로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배우 박상종)

우리는 임영웅 선생한테 꽁꽁 묶여있는 거야. 뭐냐면, (임 연출의 노트엔) ‘세 발짝 반. 네 발짝도 아니고 세 발짝 반 나가서 시선을 45도 튼다’라고 돼 있어요. 너무 명료하게 시선ㆍ동선이 규정돼 있다 보니, 단 한 번도 정확하게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뭐 하나는 삐끗합니다. (웃음) 선생님도 아시는데, ‘시선 하나 틀렸지만 전체적으론 잘 흘러갔어’ 하시면서 술 사주시고…. (배우 이호성)

임영웅 연출이 고도였고, 고도가 임 연출이었다. 지난해 별세한 고(故) 임영웅 연출의 1주기를 맞아 그의 해석을 재현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가 오는 10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개관 40주년을 맞은 서울 마포구 산울림 소극장에서다. 극단 산울림을 창단한 임 연출은 1969년 이곳에서 아일랜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작품인 고도를 국내에 사실상 처음 알렸고, 50년간 약 1500회 공연에서 22만 관객을 동원하며 사랑받았다.

임 연출의 고도가 관객을 찾는 건 6년 만이다. 극단 산울림은 임 연출의 건강이 악화한 2019년 이후 고도 공연을 중단했다. “앞으로 새로운 고도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한 임 연출은 지난해 5월 세상을 떴다. 임 연출의 아들이자 산울림의 예술감독인 임수현은 8일 기자회견에서 “고도는 40년 전 문을 연 산울림의 개관 공연인 데다, 올해는 임 선생님의 추모 1주기”라며 “두 가지 이유로 고도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출연 배우들도 ‘임영웅 고도’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주연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역은 각각 1994년, 2005년부터 고도에 참여해 온 이호성·박상종 배우가 맡았다. 포조 역으로는 2013년부터 합류, 한때 럭키도 연기했던 배우 정나진이 출연한다. 새롭게 합류한 럭키 역에는 배우 문성복이, 소년 역에는 문성복의 아들 문다원이 캐스팅됐다.

고인의 해석을 되살릴 수 있었던 건 연출 노트 덕분이다. 임 연출은 평소 대본에 시선, 동선 등 지시 사항과 작품 분석을 꼼꼼히 메모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 산울림이 공개한 임 연출의 노트에는 다양한 방향으로 누운 쐐기가 대사 한 줄 한 줄마다 적혀 있었다. 임수현 감독은 “쐐기가 가리키는 방향이 배우 시선 각도”라고 설명했다. 럭키를 내내 옥죄고 있는 끈에 대해 ‘성서와 희랍비극에서는 끈과 신을 자주 연결한다’ 등의 해석도 적어뒀다. 산울림 관계자는 “이 노트를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도 모두 복사해 돌려봤다”고 말했다.

1987년부터 3년간 고도의 조연출이었으며 이번 공연 연출을 맡은 심재찬은 이런 스승에 대해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그는 “공연 당시 임 선생님이 요구한 시선까지 일일이 외우도록 하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나조차도 그 이유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며 “예를 들어 소년 역의 배우가 (극 중 대화 상대인) 블라디미르를 계속 쳐다보지 않고 대사를 하도록 한 부분이 있는데, 인제 와서 보니 ‘친절하게 얘기하지 말라’는 훈련을 받고 온 소년의 느낌이 들도록 의도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라고도 했다.

시대 변화에 맞춰 조금씩 바꾼 연출과 애드리브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대본은 손대지 않으면서 연기 톤이나 대사 템포 등은 변주를 하는 식”(심재찬 연출)이다. 이번 공연에서 포조는 임영웅 버전보다 좀 더 과장된 몸짓과 톤으로 대사를 읊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논점 없이 주고받는 대사는 보다 빠르고 리드미컬해졌다. 럭키의 느릿한 춤을 보며 못 마땅해하던 에스트라공이 양손을 위아래로 교차하며 로제의 ‘아파트’ 안무를 추기도 한다.

심 연출은 “과거 선배님들이 이 작품을 했을 시대엔 굉장히 획기적인 공연이었음에도, 작품을 다루는 방법은 다소 점잖았다고 표현하고 싶다”며 “이번 공연에선 원래의 대본을 살리되 좀 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배우들에게 주문했다”고 설명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다. 극은 나무 한 그루 달랑 있는 길 위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Godot)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끝내 고도는 오지 않고 그저 기다림만 계속되는 상태에서 극은 끝난다. 극 구성의 기승전결이나 논리적 타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현대 연극의 새 시대를 열었다.

한국에선 임 연출의 고도가 가장 유명하지만 2022년 극단 산울림이 갖고 있던 공연 라이선스가 풀리면서 다양한 버전의 고도가 공연됐다. 2023년 8월엔 극단 로맨틱용광로가 제작하고 김기하 연출, 배우 주진모 등이 참여한 공연이 막을 올렸고, 같은 해 12월 개막한 파크컴퍼니 제작 고도는 배우 신구와 박근형을 주연으로 앞세워 전 회차 매진 신드롬을 일으켰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