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창조주에 의해 천부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있다. 정부의 권한은 피지배자들의 동의로부터 나오며, 어떤 형태의 정부건 그것이 그 목적에 어긋날 경우 이를 바꾸거나 폐기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뉴욕에서 서남쪽으로 160㎞를 달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앞에 서자, 250년 전인 1776년 13개 지역(식민지)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발표한 미국 독립선언의 도입부가 생각났다. 이 선언은 미국을 넘어 인류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혁명적인 문건이다. 이는 수천 년간 인간을 얽매어 온 신분적 예속과 불평등을 넘어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 평등이 사회 구성의 기본원리임을 선언하는 한편 정부의 목적을 규정하고 시민들의 저항권을 인정한 최초의 문건이다. 당시 미국 최고의 지성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유럽에서 생겨난 근대 정치사상인 사회계약론과 자연권 사상, 계몽주의 등에 기초해 쓴 이 문건은 프랑스혁명 후 발표한 ‘인권선언’, 즉 인권과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알려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보다 13년이나 앞섰다.
11년 뒤인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의 주의회 건물이었던 독립기념관의 인디펜던스홀에 다시 모인 지역 대표들은 미국이란 독립 국가의 초석이 되는 헌법에 서명했다. 이처럼 필라델피아는 미국이란 나라를 만든 ‘산실’이자 미국 최초의 수도였다. 각 지역 대표들은 워싱턴을 미국의 수도로 결정하지만, 워싱턴을 건설할 때까지 1790년에서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한계 뚜렷한 미국의 독립선언과 권리선언
왜 하필 필라델피아가 미국 건국의 중심지가 됐을까? 그것은 필라델피아가 델라웨어강 입구에 있는 항구로 경제적 중심지이자 북부(뉴욕)와 남부(조지아 등)를 잇는 지리적 중간지대의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필라델피아는 미국 최초의 대학과 도서관이 세워지는 등 문화와 사상의 중심지였다. 특히 윌리엄 펜 등 영국에서 종교 탄압을 당했던 퀘이커 교도들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이례적으로 일찍이 종교의 자유를 법제화하는 등 종교의 자유와 사상적 관용을 허용했다. 그 덕으로 학문적 활동이 활발했고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자유의 종’. 박정희 독재정권이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던 1970년대 초 서울대 법대에서 이신범 등 운동권이 만든 지하신문의 제목이다. 조지 워싱턴 등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의 폭정에 저항해 각 지역대표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두 차례의 대륙회의 끝에 미국 독립을 선언하고 주의회 건물에 매달린 종을 쳤다. 이후 이 종은 ‘자유의 종’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자유와 인권의 상징이 됐다.
‘자유의 종’을 보기 위해서는 그 명성만큼 긴 줄을 서야 한다. 긴 줄을 선 뒤 막상 ‘자유의 종’ 앞에 서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자유의 종’이 아니라 그 옆에 붙어 있는 한 포스터의 제목과 사진이었다. ‘여성의 자유의 종’이라는 제목 옆에는 커다란 종을 치고 있는 한 여성의 낡은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1915년 미국의 여성들은 ‘여성의 자유의 종’을 만들어 투표권 등 여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독립선언 첫 문장(‘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속의 ‘Men’은 ‘인간’이란 뜻도 있지만 ‘남자’란 뜻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신생국 미국에서도 평등하게 창조된 것은 ‘인간’이 아니라 ‘남자’였다. 여성들은 투표권 등 기본적 권리에서 전혀 평등하지 않았다. 아니 남자도 백인, 그것도 유산자 백인만이 평등했다. 아프리카계 노예 등 유색인종들과 백인 무산자들은 제외됐다. 다시 말해 미국의 독립선언과 권리선언은 ‘백인 유산 남성 미국인들의 독립과 권리선언’에 불과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연방주의교서’는 미국 헌법 제정 당시 제임스 매디슨 등 연방제 지지자들이 쓴 글로, 상·하원 양원제, 삼권분립, 사법부의 위헌심사권 등 미국 정치의 골격이 되는 제도적 장치를 주장한 미국의 정치사상 최고의 고전이다. 제퍼슨, 매디슨 등은 독립선언 후 초기 국가형태인 국가연합(confederation)의 한계를 실감하고 국가연합보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가진 연방제를 주장했다면, 벤저민 프랭클린과 남부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작용을 걱정했다.

가부장제와 노예제라는 어둠을 함께 안아
건국의 아버지들은 결국 연방제를 채택하되 중앙정부의 위험을 견제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 등 시민권을 헌법에 명기한 권리장전을 수정헌법 제1~10조의 형태로 명문화하기로 합의했다. 독립기념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미국 헌법 센터’에는 연방주의를 놓고 열린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아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연방제 문제를 해결했지만 가장 어려운 장애에 마주쳤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제헌헌법 제1조 제2항의 ‘5분의 3 조항’이다. 이 조항은 ‘민주주의는 다른 의견 간의 타협’이라는 미국식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 건국과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충격적 내용이다.

마지막 장애는 노예 문제였다. 논쟁은 노예도 인간이냐, 아니냐였다. 나중(남북전쟁)에 노예 해방을 주장했기 때문에 북부가 인간이라고 주장했을 것 같지만,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을 인간이라고 할 경우 노예가 많은 남부가 많은 투표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남부는 보다 많은 투표권을 갖기 위해 이들도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각 지역대표는 ‘노예들은 5분의 3 인간으로 투표권과 과세에서 5명을 3명으로 계산한다’라는 ‘5분의 3 타협’을 했다. 즉 노예는 ‘5분의 3 인간’이라는 기이한 조항이 버젓이 미국 제헌헌법에 포함된 것이다(이 조항은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뒤 수정헌법 제13조에 의해 폐기된다).
필라델피아에서 서남쪽으로 5시간 정도 달려가면 토머스 제퍼슨이 살았던 몬티첼로 농장이 나타난다. 제퍼슨은 자유·평등의 열혈한 신봉자로 노예제는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미국 독립선언 초안에서도 노예제를 비판하고 이의 폐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몬티첼로에서 평균 200명, 총 6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배다른 동생인 아프리카계 노예를 정부로 삼아 6명의 자녀를 낳았다.
미국의 독립선언과 제헌헌법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중요한 유산이지만, 동시에 가부장제와 노예제라는 어둠을 함께 안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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