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입증책임 완화, ‘이게 왜 안 돼!’

2025-05-15

결국 예상대로였다. 놀랍지도 않다. 2022년 12월 강원 강릉에서 동승한 손자 이도현군(12세)이 숨진 차량 사고를 놓고 1심 법원은 제조사인 KG모빌리티 손을 들어줬다. 운전자인 할머니가 주장한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탓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약 30초 동안이나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밟고 있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요즘 차는 ‘바퀴 달린 전자제품’에 가깝다. 온갖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제어한다. 급발진 사고를 따지는 근거는 대개 ‘풀 가속’으로 찍히는 사고기록장치(EDR) 값이다. 그러나 운전자가 직접 밟지 않더라도 전기신호의 오작동으로 인한 ‘풀 가속’이 나타날 가능성은 과연 없을까. 전자장비 결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급발진인데 ‘페달을 밟았느냐’로 판단하는 건 한계가 있지 않나. 경찰은 비록 형사책임 건이지만, “기계적 결함은 없고,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에는 ‘증거 불충분’으로 할머니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간혹 하급 법원에선 ‘급발진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조사가 제시하라’며 전향적 판결을 내리기도 하지만, 대법원까지 가선 모두 뒤집혔다. 법관들은 최신의 복잡다단한 제품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복잡한 장치들은 나사 하나, 전선 한 가닥, 디지털 오류 때문에 사고로 이어진다. 2012년 11월 블랙이글의 T-50 전투기 추락도 정비사가 가느다란 전선 하나를 뽑지 않아서였다. 테슬라는 햇빛 반사에 사망사고를 냈다. 때론 제조사조차 정확한 원인을 가려내지 못할 정도다.

입증책임 논란의 또 다른 분야가 의료사고다. 간혹 운이 좋게, 의사 대신 간호사가 시술했다거나 하는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한다면 모를까, 의료사고를 환자 측이 입증하기란 너무 힘들다. 1740명이나 숨진 가습기살균제 사건만 해도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가.

이런 이슈들은 핵심 정보를 공급자들이 틀어쥔 것들이다. 최소한 ‘성실한 정보 공개 의무’라도 강화해야 옳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에선 제조사는 법원의 자료 제출 명령을 따라야 한다. 영업비밀이라며 거부해선 안 된다. 제조사가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자동차, 화학제품이나 의료행위 등에 의한 사고 때 소비자의 입증책임을 낮춰야 마땅하다. 오히려 공급자에게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로 인한 피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케 하는 방향으로 바꿔놔야 한다. 다만 소비자들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순 없다. 악용하는 ‘블랙 컨슈머’에게는 엄격한 벌칙을 가하는 보완책도 필요하다.

앞서 법무부는 2020년 피해자 입증책임을 줄여주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낸 적 있다. 피해자는 밝힐 수 있는 선까지만 ‘개략적인 피해’를 주장하고, 제조사는 ‘구체적으로 증명’토록 했다. 그러나 재계 등 반발 끝에 무산됐다. ‘도현이법’으로 불리는 제조물책임법도 국회 문턱을 번번이 넘지 못했다.

그나마 202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은 제5조(인과관계의 추정)에서 이례적인 선례를 남겼다. 특정 질환들에 한정하지 않고 피해를 포괄적으로 인정하며 입증책임을 완화했다. 대신 사업자에겐 다른 원인으로 인한 피해라고 반대로 입증토록 했다.

법적 판가름에서 종국에 최고 잣대는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 아닌가. 예컨대 근래는 시신을 못 찾아도 ‘정황상’ 살인을 인정하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는 일도 더러 있다. 주검이 없다는 건 엄밀히는 그냥 ‘실종 상태’다. 그럼에도 살인 외엔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상식적 추론’을 기초로 혈흔 등 증거들을 종합해 살인죄를 성립시킨다. 지극히 일반인의 법 상식에 부합한다는 판단에서다. 국민참여재판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근래 두 대통령을 쫓아낸 헌법재판소 결정을 봐도, 결국 ‘절대권력자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가 기준점이다.

대선판이 한창이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건 난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다만, 시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에 입증책임부터 덜어주는 게 대한민국호를 한 뼘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겠다. 집단소송제 등은 일찍이 김대중 정부 때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추구하던 해묵은 숙제다.

공허하고 달달한 정치구호로 현혹하지 말고, 실천적 약속을 보여달라.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며 “이게 왜 안 돼, 도현아!”라던 외침에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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