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원해? 치정극 내놨다…임윤찬의 ‘사계’ 충격적 변주

2025-08-28

김호정의 더클래식 in 유럽

준비된 음악의 제목은 ‘백야’, 즉 대낮처럼 환한 밤이었다. 이 곡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임윤찬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이걸 연주하기 위해서는 환한 밤의 풍경을 상상하나요?” 단순하고 평범한 궁금증이었다.

임윤찬은 깊게 생각하는 특유의 표정을 짓더니 건반에 손을 얹었다. “상상도 하지만요, 그런 상상을 피아노로 만들어내는 건 또 다른 얘기라서요.” 그는 첫 부분을 사뿐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길 보면 음악이 이렇게 단순할 수가 없고 듣기엔 깨끗하죠.” 평범한 사람들이 ‘백야’라는 표제의 이 악보를 보고서 할 생각이다.

이 정도 해석으로 성에 찰 리가 없다. 그에게는 독특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박자가 없다고 상상해요. 박자가 그냥 없는 거예요.” 8분의 9박자, 즉 8분음표(♪)가 한 마디에 9개 들어가는 악보다. 9개를 세 개씩 묶어 세 덩어리로 연주하면 깔끔한 박자가 된다. 하지만 임윤찬은 그런 ‘직선’을 일부러 피한다.

“페달을 좀 흥미롭게 쓸 수 있겠죠. 똑 떨어지는 정박(正拍)을 피하면서 신비로운 물감을 칠하는 듯 연주하는 거예요. 진짜 자연의 색채와 비슷하도록요.”

지난해 5월 JTBC의 토크쇼 ‘고전적하루’에서 임윤찬이 차이콥스키의 ‘백야’를 설명했던 장면의 뒷이야기다. 1년이 조금 넘은 이달 22일, ‘백야’를 포함해 차이콥스키의 열두 달 작품을 담은 ‘사계’의 임윤찬 음반이 나왔다. ‘백야’는 그중 5월의 표제다.

발매된 음반에는 이 대화를 훌쩍 뛰어넘은 상상의 세계가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백야’ 안에는 백야에 대한 상상이 별로 없었다. 대신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고통과 노래가 흘러나왔고, 신비로운 색깔의 세상에서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가 있었다. 임윤찬의 음악은 정해진 표제를 개의치 않고 흘러넘쳤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이 곡에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린다. ‘난로 옆에서’(1월), ‘눈송이’(4월), ‘가을 노래’(10월), ‘크리스마스’(12월) 같은 제목이 붙은 작품이니, 그럴 만하다. 그동안 청중은 누구의 풍경화가 더 아름다운지에 관심이 있었다. 임윤찬은 작품의 장르를 아예 바꿨다. 풍경화 대신 치정극 혹은 죽음의 비극으로.

예를 들어 3월. ‘종달새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임윤찬의 ‘사계’ 음반 재생을 시작하면 이 3월에서 한 번 걸릴 것이다. 무심히 듣기에는 지나치게 짙은 슬픔 때문이다. 여러 피아니스트 버전으로 3월을 들어왔던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다. 임윤찬의 연주가 더 느리거나 감정을 과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임윤찬의 ‘종달새의 노래’는 1999년 나온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보다 훨씬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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