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ㆍ김환기ㆍ김종영ㆍ노은님, 다 이 사람 통해 알려졌다…화단의 ‘절대안목’ 정기용 별세

2025-06-24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지관을 데리고, 묫자리를 찾아다닐 그런 나이가 됐으나,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1986년 백남준(1932~2006)은 그해 숨진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는 전시 ‘보이스 복스’를 열며 도록에 이렇게 적었다. 서울 원화랑과 현대화랑에서 굿판까지 벌인 전시였다. 1984년 2월 원화랑이 국내 첫 백남준 전시를 열며 이어진 인연이다. 원화랑은 1984년 신년 벽두에 연 세계 최초의 위성중계 예술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후원하기 위해 미리 2만 달러 어치 작품을 사뒀다. 이렇게 천재 백남준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원화랑 정기용 전 대표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93세. 은퇴 후 동갑내기 백남준이 자꾸 생각난다던 그였다.

1932년 인천 태생으로 인천고,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대학 시절부터 옛 그림 수집을 시작했다. 1978년 인사동에 원화랑을 개관하며 ‘신사실파 회고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1948년 결성된 신사실파 동인 김환기ㆍ유영국ㆍ이규상ㆍ이중섭ㆍ장욱진의 회고전이다. 정규의 목판화전(1983), 장 포트리에 조각전(1986)도 그의 손을 거쳤다.

고인은 미술계 최고의 감식안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좋은 작가를 알아봤고, 그중에서도 핵심 작품을 찾아낼 줄 알았다. 조각가 김종영도 그의 눈을 통해 재평가됐고, 미국의 임충섭ㆍ존배, 독일의 노은님도 그가 한국에 소개했다. 일찌감치 발굴한 작품을 진득하게 묵혀두는 그를 두고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화상이기 이전에 뛰어난 컬렉터”라고 했다. “한국 미술의 밀알이 될 만한 것들만 고른다”며 수집한 클로드 비알라, 피에르 뷔라글리오 등 프랑스 68혁명 이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인 쉬포르 쉬르파스 작가들의 중요작은 후에 퐁피두 미술관이 이들의 회고전을 위해 빌리러 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나서기를 꺼리는 성품이라 불교 관련 작품들을 동국대 박물관에 기증하고도 이름 붙은 전시실은 물론 감사패도 고사했다. 김종영·백남준·노은님, 요제프 보이스 등의 작품 1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조용히 기증하기도 했다. 미술관 박미화 소장품자료관리과장은 "원화랑에서 컬렉션을 보고는 '저희에게 기증하신 게 더 좋아 보인다'고 말했더니 '저는 좋은 것만 내어 드립니다'라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돌아봤다.

고미술부터 현대 미술까지 두루 관심이 많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고, 신진 작가의 개인전까지 두루 돌아보던 그였다. “가슴에 와 닿아 찌릿한 전기충격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을 찾아서” 걷기를 즐긴 컬렉터 정기용, 그곳에서도 밝은 눈으로 소요(逍遙)하겠다. 빈소 서울 성모장례식장, 발인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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