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를 해치고, 반려견은 독살하겠다.”
강도, 유괴범 등 범죄자의 멘트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 옆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는 일부 야구팬이 선수에게 전달한 메시지다. 2년 연속 1000만관중을 달성한 프로야구, 그 폭발적 흥행 뒤에 드리운 그늘이다.
최근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테러 사례를 수집 중인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관계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하는데… ‘이 정도로 심하다고?’ 싶을 때가 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한 선수는 “퇴근길이 가장 무섭다”고 털어놨다. 집에 가서도 편히 쉴 수 없다. 불안한 마음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응원과 비난의 경계가 무너졌다. 실책이라도 나오면 원색적인 욕설이 쏟아진다. 화살은 이내 선수 개인을 넘어 가족과 지인의 SNS까지 향한다. 휴대전화 알림을 꺼도 마음까지 잠그긴 어렵다.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누군가의 조준선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짓누른다.
비공개로 운영하던 계정까지 찾아내 메시지를 남기는 일도 잦다. 숨을 곳이 없다는 두려움마저 엄습한다. 팬심을 빙자한 폭력이다. 선수들의 일상까지 잠식하고 있다. 서주애 닥터서 스포츠심리연구소 대표 겸 유한대 건강웰니스학과 겸임 교수는 “악플에 시달린 선수는 세상이 모두 자신을 손가락질한다는 생각에 빠져 대인기피증을 겪고, 경기력에도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선수협이 칼을 빼들었다. 지난 15일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업무협약을 맺고 SNS 피해 선수의 법적 절차를 대리하기로 했다. 선수 요청 시 가해자를 상대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장동철 선수협 사무총장은 “사실 법적 분쟁까지 가지 않고, 경고 효과만으로 사태가 잦아들길 바라고 있다”면서도 “지난해, 그리고 올해 들어 피해 접수가 확 늘었다. 날이 갈수록 표현 수위라든지 그렇고, 선수들이 느끼는 고통도 깊어지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임계점을 넘어 위험한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다.
지난달 선수협이 실시한 실태 조사 결과로도 드러난다. 응답 선수의 73%가 SNS서 악성 댓글이나 DM 피해를 겪었고, 부모(31%)와 배우자·연인(13%) 등 가족을 겨냥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살해 협박, 성희롱, 스토킹, 주거 침입 등 형사범죄에 해당하는 사례까지 보고됐으며, 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36%), 경기력 저하(14%), 수면·식욕 장애(11%), 심지어 은퇴·이적 고민(4%)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이버 테러’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올 시즌 프로야구 홈런왕을 예약한 내야수 르윈 디아즈(삼성)는 SNS를 통해 “한국에서 받은 사랑에는 감사하지만, 아내와 반려견을 해치겠다는 위협은 용납할 수 없다”며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는 프로스포츠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끝난 ‘2025 아이콘 매치’에서 박주호가 역전골을 터트렸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상황. 그러나 일부 팬들은 승부차기가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박주호의 SNS에 무자비한 욕설, 조롱을 했다. 심지어 박 위원은 “다양한 반응을 겸허히 듣겠다”는 입장문까지 올렸다.
댓글이나 메시지를 통한 욕설과 조롱, 이것은 명백한 범죄다. 모욕죄(형법 제311조),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 정보통신망법 위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 등에 해당할 수 있다.
선수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몰라서 참는 것이 아니다. ‘팬들이 있기에 선수들도 존재한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있기에, 그리고 여전히 애정어린 응원을 아끼지 않는 진짜 팬들이 있기에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팬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마음대로 상처 내도 된다는 면죄부는 없다. 응원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진 말들이 돌이킬 수 없는 흉기로 변하지 않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춰 돌아봐야 한다.

김종원 기자 johncorners@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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