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었다. 이 일대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해 16세기 중반 세계 은의 약 절반을 생산했다. 은을 기반으로 스페인은 부유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스페인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는 북미로 눈길을 돌렸다. 1606년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설립을 인가해 식민지 개발에 착수했다. 금·은을 채굴하고 환금성 작물을 재배해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영국인 개척단은 1607년 버지니아 해안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12년 후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와 설탕·담배·면화를 생산했다.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경제는 영국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1620년 12월에는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의 차가운 해안에 102명의 영국인이 도착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들은 상당수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분리파 청교도 순례자였다. 그로부터 20여년간 수만 명의 청교도가 몰려들어 식민지 뉴타운을 건설했다.
남부와는 여러모로 결이 달랐던 북부 식민지는 원주민과의 모피 거래, 조선과 해운업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이들도 활발한 무역에 나섰다. 카리브해에서 당밀을 수입해 럼주를 제조했다. 보스턴에서 출발한 무역선은 럼주를 싣고 해외로 떠났다.
식민지 경제는 영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하지만 수익성 높은 제품은 영국에만 팔 수 있었고 유럽 제품을 수입하려면 영국을 거쳐야 했다. 영국 정부는 관세를 부과해 자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된 당밀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다.
1733년 영국 의회는 ‘당밀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프랑스·네덜란드 등 비영국령 섬에서 생산된 당밀을 수입하려는 미국 상인에게 갤런당 6펜스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밀수가 성행했다. 식민지 관리는 이를 눈감아줬다.
1764년의 ‘설탕조례’는 미국인이 영국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례는 당밀에 부과하는 관세를 절반으로 낮추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실제 징수였다. 밀수를 더는 묵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밀수범에 대해서는 현지 배심원이 아니라 영국이 임명한 판사가 직접 단죄하게 했다. 대상 품목도 와인, 커피, 의류 등을 모두 포함했다. 이로 인해 북부 경제의 주력인 럼주 생산은 경쟁력을 잃고 교역도 감소할 판이었다.
미국인은 강력한 조세 저항에 나서는 동시에 영국산 제품의 불매 운동에 돌입했다. 영국 정부는 2년 후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조례를 바꿨다. 하지만 상할 대로 상한 미국인의 마음은 독립을 준비했다. 9년 후 불을 뿜은 독립전쟁의 출발점은 관세였다.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페드시그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