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스펙터 블랙배지

2025-07-12

‘7억대’ 롤스로이스 최초의 고성능 전기차…큰 차의 부담감 느껴지지 않는 시승감 돋보여

뒷좌석 ‘회장님’보다는 주행 즐기는 ‘영 앤 리치’ 겨냥…실용 그 이상의 ‘감각 세계’로 확장

“차 값이 7억이 넘으면 당연히 좋아야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7억의 자리에는 사실상 1억원 이상의 아무 숫자나 넣어도 대충 말이 된다. 6000만원이나 7000만원짜리 차도 충분히 비싸지 않냐고? 맞다. 하지만 한국은 연소득 대비 자동차 구매에 쓰는 비용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다. 그래서 현대 싼타페 같은 베스트셀러를 살 때도 참 많은 사람이 5500여만원을 쓴다. 팰리세이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가솔린 하이브리드 풀옵션의 가격은 7000만원을 넘는다. 그래도 많이 팔린다. 그 와중에 1억원이 넘는 차들은 ‘이유가 있다’고 어쩐지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7억 주고 이 차를 산다고? 나 같으면 ( )을 하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큰돈으로 다른 차를 사거나 다른 경험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롤스로이스 대신 집 한 채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는 순간 감가가 시작되는 자동차에 7억원을 태우기에는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 7억원이 넘는 자동차의 대중적 비현실성을 본능적으로 인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7억? 롤스로이스 스펙터? 게다가 블랙배지? 그 차는 누가 사? 어떻게 살아야 그 차를 살 수 있는 거야?”

좋은 것도 가치도 알겠는데 그 ‘누구’가 궁금한 것이다. 얼마나 성공해야 할까. 아빠가 부자여야 할까? 아니야, 할아버지 대부터 부자여야 할 거야. 총자산은 얼마 정도여야 할까. 어떤 직업을 갖고 있을까. 내가 언젠가 그 차를 사려면 남아 있는 시간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스펙터(specter)의 의미는 유령, 혼령이지만 ‘롤스로이스 스펙터’는 분명히 존재하는 물건이니까. 존재하는 건 (돈이 있다면) 살 수 있다. 살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을 것이다. 게다가 스펙터는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롤스로이스 최초의 순수전기차다. 그렇다면 블랙배지는 뭘까.

블랙배지는 롤스로이스가 만드는 고성능 모델에 붙는 이름이다. 더 빠르고 역동적이다. 여느 브랜드의 스포츠 모드처럼 과하게 몰아세우면서 사람을 흥분시키는 쪽은 아니지만 그 단호하면서도 우아한 움직임 자체에 빠져드는 감각. 경쾌하고 강력한데 꿈처럼 부드럽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앞 유리 밖으로 보이는 배경이 끈적하게 녹아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달릴 수 있다. 한 번 경험하면 내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두근두근해서 긴장이 큰데 동시에 달콤해서다.

스펙터 블랙배지의 전장은 5490㎜. 그러니까 5m를 훌쩍 넘는데도 운전석에서는 그 크기를 전혀 의식할 수 없다. 차라리 콤팩트 해치백을 운전하는 것 같은 재미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지난 6월5일 일본 지바현에 있는 마가리가와 서킷을 몇바퀴나 돌면서 체험한 결과다. 운전석에 앉았던 나도, 조수석에 동석했던 프로 드라이버도 같은 감각이었다. 그가 말했다.

“롤스로이스를 사러 온 고객이라고 해서 다 운전을 잘하는 게 아니잖아요? 특히 여성분들은 이 크기 때문에 긴장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일단 운전을 시작하면 누구나 좋아하죠. 큰 차라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그냥 작은 차를 운전할 때와 같은 감각으로 움직이니까.”

몇가지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롤스로이스를 왜 직접 운전하지? 롤스로이스는 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앉기 위한 차가 아니었나? 롤스로이스가 왜 전기차를 만들었을까? 그래서 스펙터라는 차가 나온 건 알겠는데, 게다가 블랙배지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모든 질문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일단 첫 번째 질문부터.

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앉는 롤스로이스는 여전히 실존하는 이미지이면서 강력한 스테레오 타입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건실한 기업 회장이 치열한 회의 끝에 거액이 걸린 결정을 마친 후, 마침내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아 넥타이를 풀고 호흡을 고르는. 롤스로이스는 바로 그런 오너가 실내에서 느끼는 자극과 스트레스의 요소를 극단적으로 줄이기 위해 아주 작은 부품까지 새로 설계하는 브랜드다. 공조 장치에서 바람이 나올 때 으레 들리는 그 소리, 그러니까 공기가 일정한 속도로 관을 통과하는 소리를 줄이거나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설계를 아예 새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송풍구의 매끄러운 금속 마감을 손톱으로 가볍게 퉁겨보면 ‘땡~’ 하고 맑은소리 또한 들을 수 있다. 거품이 막 차오르다가 꺼지기 시작하는 샴페인 글라스를 서로 가볍게 부딪치며 건배할 때 들을 수 있는 그 소리.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들으면 상쾌해지는 그런 소리.

그러니까 거슬릴 소리는 없애거나 수정하고, 어떤 소리는 롤스로이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섬세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롤스로이스도 새로운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빠르게 확장하고 창조했다. 뒷좌석에 앉아 완벽한 평화를 즐기고 싶은 고객도 있지만 운전석의 감각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취향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브랜드 최초의 전기차 스펙터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2010년까지만 해도 롤스로이스 고객의 평균나이는 56세 정도였다.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하지만 2017년에는 45세가 되었다. 2025년에는 그보다 더 낮아졌다. 북미 시장 기준, 롤스로이스 스펙터를 새로 구매하는 고객의 평균연령은 무려 35세였다. 이른바 ‘영 앤 리치’ 시장의 등장. 게다가 스펙터를 구매한 고객의 40% 정도가 롤스로이스를 처음 사는 고객이었다.

롤스로이스가 스펙터를 전통적인 5도어 기함으로 만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스펙터는 쿠페다. 뒷문이 없다. 뒷좌석에 앉을 땐 거대한 도어를 열고 타야 한다. 여유와 편안함에 대한 양보 같은 건 전혀 없지만, 쿠페를 선호하는 취향은 분명히 젊다. 전기차를 선택하는 결정 역시 젊다. 시장 수요부터 장르까지 일맥상통하는 맥락이 있다.

고성능 블랙배지까지의 확장도 다르지 않다. 감각은 물성을 통해 확장하는 법. 6억2200만원부터 시작하는 스펙터에 반응하는 시장이라면 약 1억원을 더해 659마력의 최대출력과 109.6㎏·m의 최대토크를 낼 수 있는 블랙배지에도 반응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롤스로이스의 창립자 찰스 롤스는 “전기차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조용하며 냄새도 없고 진동도 없으니 충전소만 잘 갖춰지면 유용할 것”이라는 말을 무려 120년 전에 했었다. 롤스로이스가 만드는 전기차는 어쩌면 숙명이었던 것이다.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내연기관을 쓸 때조차 진동과 소음 없이 마법의 양탄자처럼 움직이던 롤스로이스가 마침내 전기차 시대를 만난 것이다.

A부터 B까지의 이동이 전부인 사람이 고를 수 있는 차는 당연히 아니다. 롤스로이스는 럭셔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브랜드고, 그 세계에서 중요한 건 실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상징과 감각을 이해하려는 호기심.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태도.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내는 브랜드의 철학이 핵심이다. 롤스로이스가 스펙터라는 전기차를 만든 것도, 블랙배지라는 고성능의 세계로 확장한 것도 그 명료한 흐름 위에 있다. 살 수 있다면 모쪼록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망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언제나 시대의 정점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는다.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하듯 가볍게>를 썼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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