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협력 20년마다 '초일(超日)'의 징검다리 하나씩 놓였다 [월간중앙]

2025-05-23

한일수교 60주년 특별기획 | K-철강, 반도체, 자동차 릴레이 퀀텀 점프 스토리

한국 기업 오너들, 막강 권한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중요 결단 내려

미·중 대립, 자유무역 퇴조…협력 경험 가진 한·일 공동보조 필요

오는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를 향한 레이스가 뜨겁다. 이재명 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지지율 1~3위를 달린다. 이들 중 누군가는 6월 16일 주한 일본대사관이 서울에서 개최하는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할 전망이다.

양국은 1965년 6월 22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수교 40주년(2005년)과 50주년(2015년)을 맞아 두 나라는 상대국에서 각각 대사관 주최 기념 리셉션을 열었고, 양국 정상이 교차 참석해 축사하는 전통을 만들어 왔다. 2005년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고미즈미 준이치로 총리, 2015년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각기 자국(自國)에서 열리는 행사장을 찾아 우호를 다졌다.

올해는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6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각별하다. 60 갑자(甲子) 순환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양국 정부도 지난해 12월 60주년 공식 로고와 슬로건을 선정한 데 이어, 올 2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타워, 도쿄타워를 동시 점등하는 등 우호·협력의 60년사를 기리는 일련의 사업을 진행해왔다.

6월이면 관행대로 서울과 도쿄에서 대사관 주최 기념행사가 열린다. 한·일 외교 당국은 60주년 기념 전체 행사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6월 3일 선출되는 21대 대통령이 2주일 뒤 서울에서 열리는 리셉션에 참석한다면 새 정부의 한·일 관계, 한·미·일 관계 운용 방향을 담은 키워드와 메시지를 내놓을 수도 있다. 6월 16일 주한 일본대사관 기념 리셉션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국교 수립 40주년이던 2005년 주일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했던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는 “상대국 대사관 주최 행사에 한·일 양국의 최고 지도자가 참석하는 건 소중한 관행”이라며 “이는 두 나라 우호 증진에도 중요한 외교 행보”라고 강조했다.

지난 60년 동안의 한·일 관계는 협력과 견제, 갈등과 소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역사·영토·외교적으로는 긴장 상태에 놓이곤 했던 게 이웃하는 두 나라의 숙명이었다. 또 크게 보면 국가 간 격차 감소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한국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교역 규모는 500배. 인적 교류는 1200배 증가했다”는 말로 60년 동안의 한·일 관계 행로를 짚었다. 인적·물적 교류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것. 1965년 당시 양국 간 인적 왕래 건수는 1만 건 안팎에 그쳤다. 지난해엔 일본인 850만 명, 한국인 350만 명이 상대국을 찾았다.

외교부는 “보다 많은 이들이 왕래하면서 서로를 깊이 이해해 왔다는 점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부연했다.

“한·일 수교 60주년 성적표는 80점, B+”

한국 정부는 한·일 양국이 상호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대등한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부각했다. 외교부 측은 “양국은 첨단 산업이라든지 에너지, 기후 환경 등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늠했다. 라종일 석좌교수는 국교정상화 60주년 성적표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은 경제와 안보의 공동 이익을 위해 양국 관계를 잘 관리해 왔다”면서 “이 정도면 한 80점, B+는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실 대한민국 입장에서 지난 60년은 일본에서 배우고, 경쟁하며, 넘어서려는 도전의 세월이었다. 1965년 수교 이후 한·일 경제 협력을 통해 부국(富國)의 초석을 놓았다. 1960년대 제철, 1980년대 반도체·자동차. 2000년대 2차전지 등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탈일(脫日), 초일(超日)의 스토리를 써왔다.

우리가 산업화의 기반을 닦는 데는 특히 일본과의 협력이 주효했다. 국교 정상화와 경제 개발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다년간의 국교 정상화 교섭 결과, 1965년 한일 기본 조약과 함께 한일 청구권 등 부속 협정이 맺어졌다.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등 총 5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제공키로 했다. 이 돈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의 종잣돈으로 활용된다. 일본으로부터의 자금 지원이 절실했던 한국 정부는 재정 확충 필요에 의해서도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 재계도 고도성장이 가져온 고임금 비용을 우회하는 방편으로 경공업 제품을 싸게 만드는 기지로 한국을 활용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한국 경제 선순환 구조의 비결

국교 정상화 60년은 대한민국 경제사를 새로 쓴 거인들이 정배열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의 제철 신화가 시작됐고, 이병철·정주영이라는 재계의 큰 별들이 반도체와 자동차라는 국가기간산업을 일으켜 세운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은 “한국 기업의 황제(회장)들은 막강한 권한만큼이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저서 〈일본이 온다〉에서 기록했다. 그는 특히 “(한국이) 일본을 추격하고 추월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리더십은 기업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돌이켰다.

청구권 협정 자금으로 세워진 대표적 기업이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이다. 포항제철 건설에 총 1억2000만 달러가 투입됐다. 당시 일본이 준 돈의 24%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에 더해 일본의 야하타, 후지, 닛폰 강관 등 3개 제철소가 기술을 보탰다.일본의 기술과 설비가 포철 건설의 토대를 이룬 셈이다. 이 사업은 “한·일 산업 협력의 시작”이라고 산업경제연구원(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2015년 펴낸 ‘한·일 산업 협력 패턴의 변화와 향후 과제’)에서 규정했다.

포스코의 첫 쇳물이 나온 때는 1973년이다. 당시 한국의 조선 건조량은 1만2000t, 자동차 생산은 2만5000대에 불과했다. 7년 뒤인 1980년 포스코의 조강 생산량은 590만t, 자동차 생산은 12만 대로 급증했다. 2024년 포스코의 국내 조강 생산량은 3500만t, 국내 자동차 생산은 412만 대에 달했다.

포스코 측은 이후 전개 과정에 대해 “포스코는 내수(內需) 우선 정책을 통해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높은 철강재를 생산·공급함으로써 1980년대 이후 자동차, 조선, 전자 등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가능케했다”고 자평했다. 나아가 “이렇게 성장한 수요 산업이 거꾸로 철강 산업의 든든한 수요 기반이 되어주며 한국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안착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묘역을 참배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은 고(故) 박태준 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바람 타지 않는 포항제철’ 만들기에 올인했다. 정부는 제조업 기반 산업이라 할 철강을 적극 육성했고, 이는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린 기반으로 작용했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산업에 뛰어든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1983년 유명한 ‘도쿄 선언’으로 퀀텀 점프를 시도한다. 당시만 해도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던 삼성이 첨단 기술인 초밀도 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키로 한 것이다. 고밀도 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삼성의 야심 찬 선언에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은 ‘시기상조’, ‘과대망상’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삼성은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는 반도체 공장을 8개월 만에 짓고, 64K D램, 256K D램 수율을 끌어올린 끝에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분야 글로벌 1위에 올라섰다는 게 김현철 원장의 설명이다.

도쿄 선언 당시 이 회장 나이는 73세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반도체 사업은 막대한 설비 투자에다, 기술혁신 주기가 짧아 많은 위험이 따르는 분야였다. 이 회장은 “그 위험을 뛰어넘어 성공을 쟁취해야만 삼성의 내일은 열린다”며 그룹의 명운을 건 투자를 밀어붙였다.

두 나라 윈-윈 가져온 수직적 분업 구조

최근 영입이익률에서 세계 2위에 올라선 현대차도 반 세기 전에는 무명의 메이커에 불과했다. 현대차가 첫 독자 모델인 포니를 출시한 시점은 1975년. 1980년대 3저(低)(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에다 마이카 붐에 힘입어 1986년 엑셀 자동차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 포드, 일본 미쓰비시의 엔진을 가져다 쓸 때다.

1983년 여름,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언제까지 남의 엔진을 쓸 것인가”라며 자체 엔진 개발을 독려했다. 미쓰비시 엔진을 뜯어가며 기술 습득에 열을 올린 결과, 1991년 알파 엔진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현대차는 엔진 기술을 전수해주던 미쓰비시는 물론 혼다, 닛산 등 일본의 주요 자동차 업체들을 제치고 글로벌 톱3의 반열에 올랐다.

2000년대 들어서는 배터리 등 2차전지가 고도성장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1990년대 2차전지 전량을 일본에 의존하던 LG의 구본무 당시 회장은 리튬이온전지를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낙점하고 개발을 독려했다. LG는 2007년 들어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와 양극재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데 돌입하는 등 일본을 압박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격언은 한·일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경제 협력으로 한국만 특별한 혜택을 본 건 아니라는 것이다. 서승원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일본측에서 그렇게 기술 이전에 적극적인 건 아니었다”면서 “한국이 1인당 GDP 역전 등 대등한 경쟁력을 확보한 건 일본 모델을 열심히 따라잡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당장 한·일 경협 초기의 수직적 분업 구조는 일본 상품이 한국 시장으로 진출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당시 한·일 경협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반영했다. △일본의 일방적 협력 △정부 중심 △제조업 수직 분업이 그것이다. “이게 만성적인 한·일 무역 역조를 낳는 구조”였다고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전한다. 1960년대 일본의 자금이 들어오고, 1970년대 중화학 공업과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한국으로 유입됐다. 1980년대 안보 경협 시대를 거치면서 기술과 통화(通貨) 협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무역 역조는 이런 흐름의 산물이었다”고 이 교수는 진단한다.

(재)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제인들은 노동집약산업을 한국으로 보내고자 했다. 때마침 한국도 일본에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경공업을 인수해 수출 증대와 경제 발전의 디딤돌로 삼고자 했다. 중공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주로 사양화 추세 업종을 이전했고, 한국은 이마저도 적극 활용할 이득이 있었다. 서로가 이익을 보는 관계였다는 말이다.

(재)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은 1967년 4억7000만 달러로 1965년의 두 배를 뛰어넘었으며, 한국은 미국에이어 제2의 수출국으로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 재단은 지난해 말 발간한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한·일 경제협력의 길’ 자료에서 “특히 기계류의 수출이 많았다”면서 “1968년 일본 기계 수출 중 12.2%가 한국에 수출됐다”고 공개했다.

한·일 양국 정부의 ‘잃어버린 10년’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아시아경제연구소 상석(上席)주임조사연구원으로 있는 아베 마코토(安倍誠) 박사는 한·일 협력 경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다. 아베 박사는 초창기 한·일 경제 협력 역사를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조망한다.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기술과 함께 소재, 부품, 제조 기계도 수입했다. 이를 조립·가공한 최종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큰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 기업 역시 한국에 소재, 부품, 제조 기계를 수출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직적 분업’의 관계는 한·일 양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990년대 이후 한·일은 경합 관계에 접어들었다. 한국 기업이 성장하면서 일본에서 수입하던 소재와 부품, 제조 기계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품목이 늘어난 것이다. 그 결과 “제3국 시장에서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이 경쟁을 벌이게 됐다”고 아베 박사는 지적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도, 기업도 일본의 산업 정책과 사업 전략을 모델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산업 구조와 주요 수출 품목이 비슷했다. 앞서가던 일본 기업의 성장이 정체되자 경쟁은 치열해졌다.”

2010년대 들어서는 일본 우위 구도가 흔들렸다. 한국이 상당 제품의 국산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글로벌 밸류 체인이 다시 짜였다. 직거래가 주축이던 한·일 사이에 아세안, 중국 등 제3국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한·일 간 교역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새로운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주요 국가 중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에서 비교적 일찍 탈출한 한국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에 날개를 단 듯했다. 삼성전자가 만드는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일본의 소재, 부품이 들어갔다. 한국 경제의 사이즈가 확대되면서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의 수익성도 개선되는 구조로 이행했다. 양국의 일방적·수직적 관계가 쌍방적·수평적 관계로 변화하는 증거들이다.

이런 와중에 한·일 간에 전에 없던 첨예한 역사·외교 갈등이 분출한다. 2012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를 공식 방문했다. 며칠 뒤에는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일제 강점이 악행과 만행을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일본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또 한·일 정부 합의로 2016년 출범한 화해·치유재단이 2018년 해산되고, 2019년 8월 문재인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파기하는 등 격변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2018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 판결은 수면 아래 긴장을 한껏 고조시켰다. 급기야 소재와 장비 부문에서 강점을 가진 일본은 2019년 불화수소 등 반도체 소재 3품목 수출 규제 카드를 빼들었다.

한·일 간 리스크는 이처럼 늘 외교, 역사, 정치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갈등 요인이 경제와 산업 활동에 주름살을 드리우지 않아야 한다는 이른바 ‘정경 분리 원칙’이 2010년대 들어 깨졌다고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평가했다. “2010년대 한·일 양국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했다.”

협력의 중층 구조에 한계 보이는 정부 리더십

이때는 한국 기업의 부상(浮上)으로 양국이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예컨대 2014년 자동차 부품의 대(對)일본 수출이 흑자를 기록했다. 또 제3국에서의 한·일 기업 간 협력 확대 등 양국 간 산업 협력의 패턴이다양해졌다.

양국 간 협력 구조도 중층적으로 전개된다. 반도체같이 한·일 기업 간 상호 의존성이 강한 산업은 여전히 협력을 필요로 하지만 자동차처럼 대칭적 경합 관계의 산업은 세계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로 변모했다. “기업들의 합리적 판단이 한·일 경제 협력의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이창민 교수의 진단이다. 산업마다, 기업마다 각기 다른 논리에서 한·일 관계를 사고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중층적 구조는 과거와 같은 정부 주도의 정책 리더십의 한계를 시험한다. 동북아 주요 협력 축인 한·미·일의 리더십이 교체됐거나 교체기에 있다. 정치와 외교에 변수가 더 추가되는 국면이다. 이런 때일수록 과거를 제대로 되짚어보고 장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아베 마코토 박사는 “오랜 협력의 역사를 한·일 양측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를테면 일본의 일각에서는 과거 관계에 집착해 현재 한국의 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식이다. 한국 일각에서도 현재의 대등한 경합 관계와 일부 한국의 우위에 집착한 나머지 지금의 한국이 강력한 일본과의 협력 관계 위에 세워진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 경제에도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미·중 대립의 심화, 글로벌 차원의 권위주의 부상, 자유무역의 퇴조 국면은 다시 한·일 협력을 부를 수도 있다고 아베 박사는 강조한다. “한·일 간에는 그동안 구축해 온 협력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양국이 자유무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협력해서 세계적인 틀을 구축해야 한다.”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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