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여백 속 빛바랜 손글씨

2025-10-29

책을 읽다가 여백에 남긴 글을 ‘여백 메모(마지널리아·marginalia)’라고 부른다. 몽테뉴·뉴턴·다윈 등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여백 메모를 남겼다. 그렇다면 인류 최고의 여백 메모는 무엇일까?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1601~1665·사진)는 3세기 디오판토스의 책 『산학』을 읽다가 여백에 여러 메모를 남겼다.

페르마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이 이 책의 여백에 적힌 아버지의 메모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지 1670년에 메모를 담은 이 책을 메모와 함께 그대로 출판했다. 그중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리는 메모 옆에는 여백이 부족해 증명을 쓸 수 없다는 말을 함께 남겨 놓았다. 그 후 “여백이 부족해”라는 말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증명에 도전했지만 300년이 넘도록 번번이 좌절의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을 자양분 삼아 수론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이때 태어난 이론들이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페르마의 메모가 가히 역사상 최고의 여백 메모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오래전 버트런드 러셀의 1897년 작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에세이』를 읽다가 여백에 메모를 여럿 남겼다. 최근에 강의 준비를 위해 이 책을 다시 꺼내 책장을 넘기는데 물음표가 붙은 흐릿한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이 뭐길래 그랬을까?

러셀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처음엔 흐물흐물한 껍질을 잘라내더니 그의 영리함이 끝내 신(神)을 잘라내는구나.” 당시엔 정체를 알 수 없던 ‘그’가 이번엔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낸 욕망의 주체, 우리의 ‘자아’가 아닌가! 오래된 메모가 때를 기다린 끝에 글을 깨웠다.

이처럼 책의 여백에 쓴 메모는 우리의 생각을 다시 깨우기도 하고 우리를 추억 속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때론 페르마의 메모처럼 우리 삶의 먼 길을 동행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 오래된 종이책의 여백 속 빛바랜 손글씨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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