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평화를 완성하기 위해 조선독립군 사령관이 됐다.”
평생을 항일무장투쟁에 바친 오동진 장군(1889년~1944년)은 일제가 살인교사 등 혐의를 씌워 세운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당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장군은 1927년부터 독립군 1만 4149명을 지휘했다. 일제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관리 살상 149명, 밀정 등 살상 765명이라는 기록 자체가 장군에 대한 일제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장군은 1919년 3·1절 독립만세운동 당시 맹렬한 활동으로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는 실질적 군대인 광복군을 조직했고, 장군은 광복군총영장(總營長)을 맡았다. 일제 중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등을 주도한 장군은 다양한 조직을 통합, 확대 발족한 대한통의부에서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을 겸직하며 독립군을 총지휘해 항일전을 펼쳤다.
변절한 옛 동지의 밀고로 1926년 신의주 악질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힌 장군은 193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장군은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경성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34년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장군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예를 갖췄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인 의사가 장군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병명을 붙여 1944년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했고, 장군은 광복을 9개월 여 앞둔 같은해 12월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직인까지 찍힌 장군의 훈장은 정작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훈장증을 전할 유족을 아직 찾지 못해서다.

11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올 3·1절 기준 포상자는 1만 8258명인데, 이 중 후손을 확인하지 못해 훈장증을 전달하지 못한 유공자가 7342명에 이른다. 이 중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장군이 유일하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과거 국가가 그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리지 못해 후손 찾기가 활발하지 않았던 데다 기록상 독립운동 활동만 남아있을 뿐 가족관계 등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충분치 않은 게 현실이기도 했다. 장군은 무호적 상태라 보훈부가 지난 2022년 직권으로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박용만 선생의 훈장증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역시 유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 등에서 활동한 선생은 1905년 미국으로 망명, 미국 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도 선출된 그는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독립전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에 대해 1995년 건국훈장인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 운동의 기록과 서훈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훈장 전수까지 이뤄져야 포상 독립 유공자들의 업적을 온전히 기릴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부 차원의 노력을 넘어 전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후손을 찾지 못한 포상 유공자의 명단은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손은 제적부, 족보 등 서류를 갖춰 보훈부에 후손 인정을 신청할 수 있다.(전화문의 1577-0606)
특별취재팀=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