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한다는 건 곧 지켜준다는 것

2025-11-04

천장에서 뭔가 후드득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가을을 닦달하던 비가 한동안 계속 내리더니, 요사이 더 자주 굵은 흙가루가 지붕에서 쏟아진다. 한옥으로 된 암자가 노쇠하여 걸핏하면 일어나는 일인데도, 밤에는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미묘한 두려움에 잠길 때가 있다.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두려움은 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 집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후드득하는 소리에 속아서 오늘도 잠을 설친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별일 아닌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긴 여름이 지나고, 언제 오려나 싶던 가을이 왔다. 조금 이른 단풍이 서툴지만 곱게 물들기 시작해서 눈만 들어도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풍경이 길가에 펼쳐진다. 머지않아 바람결에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운치 있다며 서로에게 멋스러움을 이야기하겠지. 잠시라도 쉼과 여유로움으로 만끽하고 싶은 가을인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의 고통이 삶의 전부일까

함께 건너는 사람 곁에 있다면

지금 이 계절도 지나가기 마련

사계절의 변화는 우리 인생에 빗대어 참 많은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일생의 흐름을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존재와 세상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우주 만물의 생성 과정을 정리한 성주괴공(成住壞空), 마음이나 생각의 변화를 설명한 생주이멸(生住異滅), 이들의 이치가 다 저 사계절만큼이나 무상(無常)한 변화를 보여주기에, 곧잘 놓치고 사는 현실 인식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통찰이 있다면 집착과 욕심을 덜어내기 훨씬 수월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세상 만물이 공기·흙·불·물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된다고 보았으니,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한, 동서양에서 말하는 우주의 원리와 세상의 이치는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며칠 전, 어느 신도가 와서 말하기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열고 보면, 많은 옷이 걸려 있는데도 정작 입을 옷은 없더라고요”라고 해서 순간 해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얘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덥거나 추워지면 그에 맞춰 옷을 바꿔입듯 성격도 때때로 변하는 것 같다. 나만 해도 여름에는 짜증이 늘고, 겨울에는 움츠러들며 옹졸해지고, 어딘가 어둑하고 깊은 곳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소심해지는 느낌이랄까. 변덕스러워지는 자신의 마음을 인내와 지혜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괜찮은 인격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법이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법화경』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비유인데, 한 부유한 이가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뒤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찾게 된다. 아들은 진실을 모른 채, 낯설고 위엄 있는 부자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처음엔 도망치려 한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데려와 잘 가르쳐서 나중엔 유산까지 물려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해 두면 좋을 인내와 배려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오랜 세월 거리를 떠돌던 아들을 무려 50년이 지나서야 찾게 되었다면, 대부분은 당장 집에 들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온 아들이 갑작스레 달라진 낯선 환경으로 인해 두려워할 것을 알고, 그가 점차 적응할 수 있도록 허드렛일부터 시킨다. 더러는 자신도 좋은 옷을 벗어놓고 아들과 함께 거름을 치우며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루하루 신망을 쌓아갔다. 모든 것이 아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큰 배려였다.

허드렛일이 익숙해지면 좀 더 나은 일거리를 주고, 차츰 더 좋은 자리를 주다가 나중엔 창고 관리까지 맡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도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며, 그가 바로 어려서 잃어버렸던 친아들임을 고을 주변에 밝힌다.

이 이야기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사려 깊은 배려를 강조하고 싶다. 보통은 아들을 지켜주는 것이 호의호식하게 하는 것인 줄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 그 자식에게 맞는 일을 주고, 스스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임을.

우리의 인생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반 이상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 같다. 사계절의 변화를 다 품고 한 계절씩 여행 중인 줄 알면서도 지금 만난 한 계절이 힘들고 괴로우면, 마치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생각되니 말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느 계절을 사느냐가 아니다. 어느 계절이건 결국 지나가게 마련이니, 어떤 마음으로 지나야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인생이란 계절을 함께 건너야 할 이가 있다면, 그를 계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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