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인권변호·노동운동…'참혹한 삶'을 스승 삼은 이재명 [대선주자 탐구]

2025-05-11

“누구? 재맹이?”

지난 3월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고향에서 만난 권오선(90)씨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깡촌에서 신문을 보고 한자도 쓸 줄 아는 게 재맹이 아버지뿐이었어. 재맹이는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았고, 제법 고집도 있었지.”

깡촌 출신 소년공의 극단적 선택 시도

권씨의 말대로 이 후보는 그 지독한 깡촌에서 음력 1963년 10월 23일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뭇 백성들이 그랬듯 그의 집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대학을 중퇴한 고학력자였지만, 농사에는 소질이 없었다. 결국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다. 어머니가 봄에 밭을 갈러 나가서야 아버지가 밭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난 속 이 후보의 희망은 어머니였다. 이 후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집을 떠난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된 40대 여성은 악착같이 살아냈다. 생계를 위한 소작은 물론, 5남매 뒷바라지를 어머니가 오롯이 떠안았다. 어머니는 이 후보에게 점바치(점쟁이의 경상도 방언)에게서 들었다며 “내가 너 때문에 호강한다더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어머니의 말은 이 후보에게 일종의 암시가 됐다. 집 나갔던 아버지가 경기도 성남이란 곳에 터를 잡고 온 가족의 상경을 명(命)한 뒤 중학교 진학은 좌절됐지만, 학업을 포기하진 않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년공이 된 이 후보는 수소문 끝에 검정고시라는 묘책을 찾았다. 야구 글러브와 스키 장갑 등을 만드는 공장에서 작업 중 프레스에 눌리는 사고로 평생 장애를 입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과 공부를 병행해 중졸·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학업을 가로막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그릇된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후보는 자서전에 “공장에서 간부들이 휘두르는 주먹보다 아버지의 그 절망이 몇 곱절 더 아팠다”고 썼다. 그러나 수면제를 달라는 그의 의도를 간파한 약사들이 소화제를 주는 바람에 살았다. 이 후보는 훗날 ‘자살할 정신으로 죽음을 각오하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나’란 생각으로 이후의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대학생 이재명이 누렸던 ‘기본소득’

‘도로 소년공’이 된 이 후보는 학원비를 스스로 해결하고 남은 월급은 아버지에 주는 조건으로 대입 학력고사 공부를 허락받았다. 오전 7시에 일어나 다음날 오전 4시에 귀가하는 살인적인 일·학업 병행 일정을 소화했다. 졸지 않기 위해 책상에 압정을 붙여놓았지만, 결말은 피로 젖은 참고서였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았다. 81년 11월 24일 친 대입 학력고사에서 이 후보는 285점의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선택은 장학생 지원이 다른 대학보다 두터웠던 중앙대였다. 등록금은 면제됐고 생활보조금은 월 20만원이 나왔다. 그 당시 월급보다 3~4배가 많았다. 그가 가난이란 굴레를 조금이나마 벗게 해준 ‘기본소득’이었다.

이 후보는 대학 동기 이영진을 통해 소위 ‘의식화 학습’을 받았다. 하지만 장애 때문에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 공장 노동자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 막연한 신분 상승의 욕망은 그를 아스팔트 대신 신림동 고시촌으로 안내했다. 86년 가을 이 후보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그는 위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향했다. 아들의 소식에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이 후보는 자서전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나에게는 용기의 원천이 됐다”고 썼다.

이 후보에게 사법연수원(18기) 인연은 무척 소중하다. 이 후보가 성남시장·경기지사를 역임할 때 여의도 정치판과 가교 역할을 한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운동권 출신인 문병호·최원식 전 의원, 문무일 전 검찰총장과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등도 연수원 동기다. 그들 대부분은 ‘노동법학회’라는 기모임에서 뭉쳤다. 연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민주화라는 큰 파도가 몰려오던 시기, 법조인으로서 사회 기여 방안을 모색하던 비공식 서클이었다.

소년 노동자에서 노동운동가 돕는 인권변호사로

그 무렵 이 후보는 무료 법률상담 활동을 계기로 성남 지역 활동가들과 어울렸고, 연수원 안에서는 노동법학회 동기들과 의기투합해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반대 성명서 발표를 주도하기도 했다. 정기승 후보자의 낙마는 그가 사회 운동의 정치적 효능감을 맛본 최초의 사건이었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소외된 지역에서 변호사 운동을 벌이자는 동기들과 뜻을 같이 하고 성남에 개업했다. 이재명 변호사의 등장은 성남에서 꽤 화제였다. 변호사란 직업 자체가 귀했던 데다 성남에서는 유일하게 ‘인권변호사’ 타이틀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 관련 시국사건이 봇물 터지듯 했다. 공단이 밀집한 성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후보도 89년 개업 직후 노동단체 간부들을 무료변론하며 법조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이 후보가 변호했던 오길성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위원(전 성남노협 의장)은 “그 시절 시국 사건에서는 ‘변호를 잘하느냐, 못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며 “사선(私選) 변호사 선임은 꿈도 못 꾸던 가난한 동네에서 무료 변론을 하는 인권변호사로 개업한 것만으로도 이재명은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얻었다”고 기억했다.

이 후보는 매주 금요일이면 성남 지역 성직자·사회운동가·지역활동가들과 어울렸다. 주고받는 술잔 속에는 지역 현안이 담겨 있었고, 때로는 그 범위가 국가로 확장되기도 했다. 오 위원과 이 후보를 성남YMCA로 이끌었던 이상락 전 의원, 이용원 성남YMCA 사무총장, 김해성 목사, 천용욱 성공회 신부 등이 멤버였다. 이들은 이 모임을 ‘금요회’라고 불렀다.

기존의 노동운동만으로 아우를 수 없는 사회 문제 등이 돌출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대응 방안을 고민했다. 일부는 실질화된 지방자치제를 활용해 광역·기초의원 등 제도권 진출을 모색했다. 이 후보의 선택은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시민단체 결성에 참여하기로 한 지역 인사들을 모아 95년 3월 30일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을 창립했다. ‘변호사 이재명’을 ‘정치인 이재명’으로 거듭나도록 한 지역사회 시민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정치 결심 이끈 시립병원 설립 운동

이후 이 후보는 성남시민모임 창립 첫해 성남 대장동 수도권 남부 저유소 건설 저지 운동을 벌이며 시민사회계에 데뷔했다. 국가사업이라 건립은 강행됐지만, 안전대책을 강화하는 성과를 냈다. 2000년대부터는 시정 감시 활동에 천착했다. 성남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상업지역→주거지역) 문제를 파헤치다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의혹을 폭로한 게 대표적이다. 이처럼 성남시 주류와 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검사 사칭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집에 수시로 걸려오는 협박 전화에 총기 허가 소지를 받아 6연발 가스총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2001년 언론 인터뷰에서 “아침에 아들이 학교 가기 무섭다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을 때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2003~2004년 성남 구도심 종합병원 두 곳의 줄폐업 이후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에 전념하던 이 후보는 주민발의로 시의회 논의 테이블에 오른 조례안이 무기한 심사 보류되는 걸 보면서 시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다. 심사 보류 직후 시의회 본회의장에서의 소동으로 수배령(특수공무집행방해)이 떨어진 그는 성남 주민교회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고심 끝에 정치의 뜻을 굳혔다. 이 후보는 지난달 27일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주민교회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그는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고, 함께 입당한 성남 지역 활동가와 지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2006년 성남시장 후보 공천장을 받았지만 낙선했다. 이후 2007년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의 팬클럽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대표를 맡으며 중앙 정치에 진출, 민주당 부대변인을 거쳐 2010년 재수 끝에 성남시장 취임에 성공했다.

포퓰리즘 논란에도 밀어붙인 무상시리즈

2010~2018년 성남시장, 2018~2021년 경기지사 시절 그의 시정·도정에 관해선 아직도 포퓰리즘(인기영합) 논쟁이 따라붙지만, 비판을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다는 했다는 점에선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성남시 모라토리엄(채무 지급유예) 선언이 그랬고, 3대 무상시리즈라 불리는 무상교복·무상급식·공공산후조리원 정책도 그랬다. 청년 배당이라 불린 청년 기본소득 정책도 퍼주기 논란에 휩싸였다. 급기야 박근혜 정부가 2016년 재정 상황이 양호한 지자체의 교부금 몫을 줄여 군소 지자체에 나눠주겠다는 지방재정개편안을 추진하자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의 무상시리즈는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를 합한 기본사회 정책으로 진화,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화두로 떠올랐다.

경기지사 때는 서울외곽순환도로의 명칭을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바꾼 것을 시작으로 경기도 내 계곡 정비 사업, 남한산성 불법 노점 정비 사업 등을 밀어붙였다. 반발을 우려한 공무원들에게 “나를 팔아라”라고 말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한 불법 노점 주위를 펜스로 둘러싸 봉쇄해버린 건 유명한 일화다. 경기도 특별사법경찰의 업무 영역을 확장하는 등 행정권 행사를 극대화하고, 코로나19 팬데믹 때 신도 명단 제공을 거부하는 신천지 본부에 직접 찾아가 “명단 확보 때까지 철수하지 말라”고 지휘하는 등 강한 행정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두 차례 대선이 남긴 명과 암

2017년, 2022년 두 차례의 대선 도전은 이 후보에게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독(毒)이 되기도 했다. 페이스메이커인 줄 알았던 2017년 대선 경선에서 선두주자 문재인 전 대통령에 네거티브 전략을 펼친 것이 두고두고 친문계와 갈등의 불씨가 됐다. 이듬해 경기지사 선거에서부터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불거지며 이에 대응하는 데 도정에 필요한 공력을 소비해야 했다. 상대 진영은 지난 대선 전후에도 이 후보를 거세게 공격했지만 끝내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이재명의 참혹한 삶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2022년 대선 당시 성남 유세 때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다. 그 참혹했던 삶을 이겨내고 입지전의 표본이 된 이 후보는 과연 세 번째 도전에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재명 후보를 비롯한 주요 대선 후보들의 더 자세한 인생 이야기는 더중앙플러스의 ‘6·3 대선주자 탐구’ 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중앙플러스 - 6.3 대선주자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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