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을 중심으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웨스팅하우스(WEC)와의 계약을 “매국”이라고 비난하는 걸 보며 2017년 문재인 정권과 아랍에미리트(UAE) 사이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인 임종석이 UAE 왕세제를 만나러 간 사실이 뒤늦게 공개된 후 야당은 “이명박(MB) 전 대통령과 UAE 간 원전 수주에서 뒷거래가 있다고 판단하고 뒷조사를 하다가 일어난 참사를 수습하러 갔다”(김성태 원내대표)고 했다.
한수원-WEC 계약 매도하지만
원자력 수출통제란 큰 틀서 봐야
UAE 때처럼 섣부른 정쟁화 곤란
청와대가 해명했는데 매번 말이 달라졌다. “UAE와 정보 교류 차원이었다.” “UAE 왕세제의 긴급한 요청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 때 소원해진 양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가 비공개 합의를 문제 삼다가 탈이 나긴 했다. 특히 아크부대 파병 등 군사협력이 쟁점이었다. 합의 때 국방장관인 김태영은 당시 “적폐청산한다며 과거 문서를 검토하다 오해한 것 같다. 나한테 전화라도 한번 했으면 한국과 UAE의 관계에 관해 설명해 줬을 것이다. 지금 시각에선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2009년엔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군사협력이 없더라도 원전 수출이 가능했을까. MB 정부 인사가 전한 일화엔 이런 게 있다. UAE 수뇌부가 “특전사를 보고 싶다”고 했으나 MB가 “3개월 후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사이 원전 발표일이 있었다. 한국이 수주해야 특전사를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문재인 청와대도, 야권도 덮었다. 국익은 그런 것이다.
한수원과 WEC의 계약을 두고 민주당은 “원전 주권을 미국에 박탈당한 굴욕적 합의”라고 한다. “협상 파기·재협상과 문책”(황명선 최고위원) 요구도 나온다.
계약만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긴 한다. 기술자립을 했는데도 WEC에 향후 50년간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줘야 할 뿐만 아니라 북미·EU(유럽연합)·우크라이나·일본 등에서 신규 원전 수주 활동을 할 수 없다니 말이다.

시야를 높이면 그러나 다른 풍경이 보인다. 우리가 제3국에 원전을 수출하려면 미국 에너지부의 수출 동의 내지는 신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원자력 수출통제다. 두 나라 공히 원자력공급국그룹(NSG)에 가입해 있고 우리 원전이 WEC의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해서다. 미 에너지부가 “미국인 또는 미국 법인이 신고해야 한다”(2023년)며 한수원의 신고를 반려한 일도 있다. WEC에 '문지기'를 맡긴 것이다.
그런 WEC의 본사가 펜실베이니아에 있다. 요즘 한·미 간에 핫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의 상징인 필리조선소가 있는 주다. 내년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느냐 마느냐 좌우할 경합주다. 필리조선소가 트럼프에 통하는 이유가 조선소인 데다 경합주에 있기 때문이란 말이 있다. WEC가 “미국 에너지 일자리를 한국에 빼앗긴다”고 한다는데 미 정부가 누구 얘기를 듣겠나.
그러니 이번 계약을 두고 “현실적 선택”(황주호 한수원 사장)이란 설명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원자력 분야의 한 교수도 “요즘 한수원-WEC 조인트 벤처 논의가 나오던데, 계약 당시부터 있었다면 계약의 밸런스가 맞았을 것”이라면서 “그렇지 않았더라도 미국을 제외한 전체 원전은 다 모아도 100기, 미국은 300기다. 어디를 선택해야 하겠느냐”고 했다. 결국 한·미 협력이 중요하다는 취지다. 공감한다. 논란 초기 대통령실이 진상조사하겠다고 했다가 최근 “여러 가지 면을 보고 있다”(김용범 정책실장)고 물러선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다시금 얻는 교훈이다. 매사에 정쟁 무기화가 우리 정치의 특장이라곤 하나, 제3국과 관련된 일이면 숨 고를 필요가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전면 재검토를 주장했던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 언론도 아닌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로서 약속이므로 뒤집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국익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