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정부가 AI 반도체 수출을 규제하려는 바이든 전 정부의 정책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상무부는 14일(현지시각) “‘AI 확산 규칙’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호관세처럼 AI 반도체도 각국과 협상하는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AI 확산 규칙이란?
AI 확산 규칙(AI Diffusion Rule)은 미국 기술이 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으려 바이든 정부 말기에 기획한 수출 통제 정책이다. 이 규칙은 세계 각국을 세 그룹으로 나눠 고성능 AI 반도체 수출량을 제한하거나 수출 자체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일본·대만 등 19개국을 포함한 1그룹 국가는 미국으로부터 AI 반도체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 인도·브라질·일부 유럽과 동남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2그룹 국가는 수입량에 제한이 걸린다. 중국·러시아·북한·이란 등 일부 중동 국가가 포함된 3그룹(적대국)은 미국산 고성능 AI 반도체 수입이 아예 불가능하다. 이외에도 2그룹 국가에는 중국산 하드웨어 수입을 금지하는 등 추가 제한을 뒀다.
AI 확산 규칙은 15일 발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 정부는 “기업에 엄격한 규제를 부과하면 미국의 혁신을 저해하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망칠 수 있다”며 정책을 폐지했다.
정책 발표 후 이어진 업계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 등 빅테크 기업은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에 제약이 발생하며, 막상 규칙을 만들게 한 원인인 중국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며 AI 확산 규칙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AI 확산 규칙에 직격탄을 맞을 뻔했던 엔비디아는 이번 소식에 “이로써 미국은 차세대 산업 혁명을 주도하고 국내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인프라 구축과 무역 적자를 줄일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반색했다.
모닝스타 분석가 펠릭스 리는 이번 확산 규칙 폐지를 두고 “(2그룹 국가에 해당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싱가포르, 이스라엘을 비롯한 나라와 엔비디아, AMD, 인텔 등 미국 기업에 큰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중국 칩 제조사와 AI 기업은 이미 미국 기술과 장비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규칙 폐지가 끼치는 영향은 적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체 방안 마련 중…中 제재는 계속”
상무부는 “향후 AI 확산 규칙을 대신할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정책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소식을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씨티은행 분석가의 주장을 인용해 “(미국이) 국가별로 협상을 진행해 AI 반도체 수출량 제한을 각각 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해당 정책과 별개로 미국은 앞으로도 중국, 특히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계속할 방침이다. 상무부는 이날 “화웨이가 만든 AI 칩 사용 시 형사 처벌받을 수 있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은 화웨이의 AI 칩 ‘어센드’ 프로세서 중 910B·910C·910D 모델에 적용된다. 상무부는 “(칩을) 미국 기술로 설계했거나, 미국 기술로 만들어진 반도체 제조 장비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는 수출 통제 규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지난 9월 자국 첨단 기술을 중국 기업에 수출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규제를 실행한 바 있다. 상무부는 화웨이가 이 규제를 우회해 어센드 프로세서를 개발한 것으로 본 셈이다.
수출 통제를 관리하는 상무부 산하 기관 산업안보국은 “세계 어디에서든 화웨이 어센드 칩을 사용하는 건 수출 통제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산 칩으로 중국 AI 모델을 훈련하는 경우에도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이와증권 분석가 릭 쉬는 “중국산 칩은 중국 안에서만 판매 중이며 수요가 공급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어떠한 방식으로 (미국산 칩의) 수출을 규제하든 화웨이의 중국 내 사업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병찬 기자>bqudcks@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