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박진경 대령

2025-12-11

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박진경 대령(1918~1948)은 제주4·3사건에서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했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외국어학교를 졸업해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후 제주에 주둔한 제38군단에 배치됐다.

그는 제주4·3이 한창이던 1948년 5월 6일 국군 11연대장에 임명됐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의 진지와 지형을 잘 안다는 점이 반영됐다.

박진경의 작전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단적이다. 당시 채명신 소대장은 선무공작을 펼치면서 양민을 살리려고 했다고 증언했다.

반면, 박진경을 암살한 손선호 하사는 무자비한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박 연대장은 화북동에서 15세쯤 되는 소년이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자, 무참히 살해했다.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총살했다. 현장에 폭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고도 명령했다.

손 하사는 박진경이 부하에 대해 애정과 연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암살한 후 도망갈 기회도 있었지만 30만 제주도민을 위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손 하사의 주장은 연대장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의 증언과도 비슷했다. 박진경은 조선민족 전체를 위해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했다. 양민을 막론하고 도피자는 3회 정지명령에 불응 시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박진경이 부임한 지 한달 열흘 만에 체포된 도민은 약 6000명에 달했다. 종군기자였던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은 12~13세 소년에서 60살이 넘은 늙은이와 부녀자를 폭도로 부를 수 있는지, 포로로 끌려가는 게 맞는지 기사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박진경은 미군의 인정을 받으면서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미군정청 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배려로 특진을 했는데 선임자를 앞질러 진급했다.

박진경은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국가보훈부가 최근 박진경 대령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발급해 논란이 일었다. 보훈부는 지난 10일 “신중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제주도는 오는 15일 박진경 대령 추도비 인근에 ‘진실의 비’(박 대령의 과오를 적시한 안내판)를 설치한다.

서울 국립현충원에는 박진경 대령을 비롯해 4·3 당시 작전을 벌인 군경 수뇌부가 안장됐다.

문용채 전 제주경찰서장은 일본 만주국 헌병 소위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그는 제주4·3 당시 취임사에서 ‘도민들은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했다.

김명 대위는 2연대 작전참모로, 함병선 2연대장의 지시로 1949년 2월 봉개마을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이다.

함병선과 김명의 이름을 조합해 재건된 봉개리 마을 이름이 ‘함명리(咸明里)’로 명명되기도 했다.

4·3 당시 양민 학살을 불러온 작전을 보면 ▲박진경 대령의 11연대 진압 작전(1948년 5월~7월) ▲송요찬 육군 계엄사령관의 초토화 작전(1948년 11월) ▲함병선 2연대장의 토벌 작전(1948년 12월~1949년 7월)을 꼽는다.

양민을 학살한 고위 장교들은 4·3 당시 무장대 토벌 작전에서 공을 세웠다며 국가유공자가 되거나 서훈을 받았다.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광주 5·18은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으로 사건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이 정립됐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양민을 학살한 군 수뇌부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