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스타트업은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후끈한 시장'과 '찬바람 부는 투자 환경'이 교차하는 2025년, 더 이상 외형 성장만으로는 이 생태계를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숫자보다 깊은 신뢰, 지원보다 앞선 연대, 제도보다 유연한 공동체다. 이를 위해 지금, 생태계의 DNA를 다시 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동안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정부와 대기업이 설계한 틀 안에서 움직여왔다. 투자 유치 금액과 고용창출 수, 매출 증가율 등 정량적 지표가 성공의 척도였고, 각종 지원 정책과 프로그램이 생태계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달랐다.
현장 목소리가 정책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고, 스타트업 간 교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벤트에 그치며, 규제나 산업간 갈등은 '누군가 해결해주겠지' 하는 식의 침묵으로 방치됐다. '지원'은 많지만 사후적이고 일방적이었으며 수요 맞춤이 아닌 공급 중심의 구조였다. 대규모 이벤트는 화려했지만 관계의 지속성은 부족했고, 실질적인 사업 연계율은 저조했다.
투자 중심의 허상도 드러났다. 단기 유치 성과는 화제가 되지만 장기 생존률은 여전히 낮았고, 창업자들은 진짜 필요한 것이 자금이 아니라 동료와의 신뢰, 실패 공유, 연대 기반 네트워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벤처기업협회 스타트업위원회의 탄생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정책과 생태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실행력 있는 민간 허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2024년 8월, 우리는 협회 내 최초의 민간 중심 위원회인 스타트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로앤컴퍼니, 버즈빌, 데이블, 알체라, 토스랩 등 국내를 대표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함께한 이 단체는 규제 대응, 글로벌 진출, 스타트업 간 교류를 실질적으로 끌어가는 실행형 플랫폼을 지향했다.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UKF82 서밋에서는 우리 위원회 주관으로 스타트업 피칭 세션을 마련했다. 5개의 우리 스타트업이 현지 투자자와의 접점을 확보했다. 6월에는 영CEO 네트워크 멘토-멘티 결연식을 지원하며, 창업자 간 실질적 멘토링 체계 구축에 협력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년 전 자생적으로 형성된 '영CEO 네트워크'가 비슷한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초창기 수백명이 넘는 초기 창업가들이 모인 이 커뮤니티는 창업자들 스스로 세운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숫자가 많다고 연대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이벤트로는 진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제2기부터는 소규모 그룹 중심, 밀착형 네트워킹 중심으로 체계를 바꿨다.
스타트업위원회와 영CEO 네트워크.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진 두 조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민간이 스스로 만드는 생태계'를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흐름에서 확인한 것은 '정책이 아닌 관계, 숫자가 아닌 신뢰'가 진짜 생태계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기업이, 정책이 생태계를 설계했다. 하지만 이제는 스타트업이 생태계를 스스로 디자인하고 있다. 우리는 수혜자가 아니라, 공동 설계자다.
생태계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 의지와 연결로 완성된다. 지금 필요한 건 다양한 정책이 아니다. 공감과 설계, 실행이다. 우리 생태계는 정부의 울타리를 넘어, 자발적 책임과 연대 기반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 방향은 분명하다. 숫자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시장의 신뢰로 증명하는 스타트업. 그런 기업들이 모이고, 그런 공동체가 자라는 생태계. 이것이야말로 한국 스타트업의 진짜 성장이다. 생존을 넘은 진화의 시대, 우리는 이제야 출발선에 섰다. 벤처기업협회 스타트업위원회와 영CEO 네트워크 같은 민간 주도의 자생적 실험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이런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용균 벤처기업협회 스타트업위원회 위원장·알스퀘어 대표 ceo@rsqua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