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 고 정주영 현대자동차그룹 창업회장은 국내 조선소 건설을 위해 일본과 미국, 유럽 등을 돌며 차관 마련에 동분서주했다. 영국 바클레이스은행과도 협상을 벌였으나 은행 측은 현대를 미덥지 않게 봤다. 여기서 정 회장은 선박엔지니어링 회사인 A&P애플도어(현 A&P그룹)의 롱바텀 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도 이때 등장한다. 정 회장은 롱바텀을 만나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던 민족”이라고 한국의 잠재력을 설명했다. 그러자 롱바텀의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수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흔히들 아는 이야기다. 일부 과장도 섞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불굴의 노력이 한국 조선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25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건넬 선물로 거북선 모형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조선업 역량이 뛰어나다는 점을 부각시켜 한·미 조선 협력의 마중물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라는 전략적 판단이 담겼을 것이다. 올해 2월 방미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금색 사무라이 투구(兜·가부토)’를 선물한 것의 대응일 수도 있겠다.
세계적 권위를 지닌 미국 유력 자동차 매체 ‘오토모티브 뉴스’는 올해 창간 100주년을 맞아 지난 18일 현대차그룹의 정주영·정몽구·정의선 회장 등 3대(代) 경영진을 ‘100주년 기념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수상자로는 도요타의 도요다 아키오 회장 등 도요다 가문, 메리 배라 GM 회장, 빌 포드 포드자동차 회장 등도 이름을 올렸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룬 쾌거로 격세지감이다.
자고로 제해권(制海權)을 가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 배 한척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마스가는 자동차 강국의 명성을 잇는 또 다른 유산이 될 수 있다. 기대를 품을 만하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막아냈던 이순신 장군이 알면 가장 기뻐할 것이다.
박병진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