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란의 ‘흑기사’ 자리를 외면했다. 이란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을 받은 12일 동안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이 모스크바를 찾았는데도 “공습은 침략 행위”란 립서비스뿐이었다.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이란은 수천 대의 무인기(드론)와 탄약·포탄을 러시아에 제공했다. 올 1월엔 양국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조약’까지 체결했다. 그런데도 푸틴은 ‘12일 전쟁’에서 철저히 이란과 거리를 뒀다.
“조약엔 (상호방위조항 같은) 군사 협력 내용이 없고, 이란의 지원 요청도 없다”(지난 18일)는 논리였다. 이란이 미국의 휴전 압박에 동의한 것엔 푸틴의 방관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사우디·이스라엘 눈치보는 푸틴

전문가 사이에선 “외교적 이해관계에 따른 푸틴의 계산된 행동”이란 평가가 나온다. 푸틴의 최우선 과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공적 마무리다. 종전 협상을 중재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홀거 슈미딩 베렌베르크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CNBC에 “푸틴이 이란 문제로 트럼프를 짜증 나게 하면 트럼프는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해 푸틴의 입지를 흔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 확산을 꺼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와의 우호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 주요 수입원인 원유 가격 조율엔 이들과의 협력이 필수다. 러시아어를 쓰는 유대인 약 200만명이 사는 이스라엘과 맞서는 것도 정치적 부담이 크다. 니콜라이 코자노프 카타르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란에 군사 지원을 하지 않은 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누구와도 관계를 망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용가치 떨어진 이란…북·중이 더 중요

반면 이란의 가치는 떨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동안 큰 도움을 받은 이란산 드론은 이제 필요치 않다. 러시아는 이란의 드론 ‘샤헤드-136’의 개량 버전인 ‘게란-2’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미 싱크탱크 제임스마틴 비확산연구센터의 한나 노테 유라시아 프로그램 국장은 파이낸셜타임스에 “러시아는 이란의 초기 드론 설계를 바탕으로 엔진과 탄두, 전파 방해 능력을 향상한 자체 드론을 개발했다”며 “전쟁 초기 크게 의존한 이란의 포탄·탄약·부품도 현재는 북한과 중국에서 지원 받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의 이란 외면이 예견된 일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하마스 등 이란의 대리 조직을 공격하고, 친(親)이란 성향의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몰락해도 러시아는 방관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급한 러시아는 중동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없다”고 전했다.
일단 보조 맞추지만…불안한 김정은

푸틴의 행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긴장하게 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러시아와 지난해 6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 10월과 올해 초 두 차례에 걸쳐 1만5000여명에 달하는 전투 병력을 러시아 쿠르스크주(州)에 파병했다. 푸틴을 든든한 뒷배로 삼고, 제재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승부수였다.
북한은 ‘12일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입장과 보조를 맞췄다. 지난 19일과 23일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격을 비난했지만, 이란에 대한 지지 표현은 뺐다. 미 북한전문 매체 38노스는 “푸틴의 중동 정세 입장을 보고받은 김정은이 (러시아와) 사전 조율해 이란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을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북한 내부에선 불안감이 일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유사시 러시아가 군사 지원을 확실히 해줄지에 대한 우려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러 조약에 상호방위 조항이 있지만, 권위주의 국가 특성상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며 “푸틴이 트럼프와 밀착하고 북한을 외면한다면 김정은으로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미국이 ‘핵 비확산’을 명분으로 1979년 이슬람혁명 후 처음으로 이란 본토를 공격했다. 트럼프와 담판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제재 해제까지 얻어내려던 김정은에게 불리한 전례가 생긴 셈이다. 핵실험을 6차례나 한 북한과 우라늄 농축률을 60% 정도(무기급은 90%)까지 끌어올린 이란의 상황을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국제사회에선 두 나라 모두 불법 핵무기 개발 국가다.
트럼프가 향후 북한에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대 공세적 협상에 나설 수 있단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박 교수는 "김정은은 이란을 보면서 2017년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를 언급하며 강하게 북한을 압박했던 때를 떠올릴 것”이라며 “중동 사태를 일단락 짓고 이르면 내년부터 트럼프의 시선이 북한을 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몸값 높이려 핵고도화·무력 도발할 것”

이에 북한이 ‘몸값 높이기’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신들은 이란과 달리 핵 무력을 완성했음을 보이기 위해 김정은이 핵 고도화에 집착하고 이를 대외에 과시할 수 있다”며 “미국의 이란 공격을 이끈 이스라엘과 달리 한반도에선 한·일 등이 과감한 군사작전을 하지 못할 거란 점을 보여주려 군사 도발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지난 17일 방북해 김정은을 만난 뒤 쿠르스크 지역에 북한 공병 병력과 군사 건설 인력 총 6000명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3차 파병이 이르면 7∼8월에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박원곤 교수는 “김정은은 푸틴을 더욱 ‘결박’ 하려 할 것”이라며 “3차 파병도 양국 군사 협력을 ‘혈맹’ 수준으로 높여 러시아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